시조 문효공 사적(始祖 文孝公 事蹟)
 

▲ 문효공 묘소 전경

 
공(公)의 휘(諱)는 순(順)이요 자(字)는 사구(士久)이시니 신라(新羅) 모량부(牟梁部) 사람 태자사인(太子舍人) 휘 학산(鶴山)의 아드님이다. 그리고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취향산(醉香山) 밑에서 살으셨다.
일찍이 부친이 돌아가시고 가세(家勢)가 빈곤해지자 아내와 같이 품을 팔아서 어머님 운오(運烏)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 노모(老母)에게 드리는 음식을 매번 빼앗아 먹으니(每奪母食) 매우 민망하였다. 이에 백씨부인(白氏夫人)에게 의논하여 아해(兒孩)를 땅에 묻어버리고 효도(孝道)의 본분(本分)을 다하고자 한다고 하니 부군(夫君)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아이를 업고 취향산 북쪽 기슭으로 가 땅을 파니 삽 끝에 옥석(玉石) 소리가 나서 공(公)이 이상히 여겨 주위를 두루 파니 둥근 옥돌이었다. 석종이다. 시험삼아 두드리니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 처가 말하기를 “아이를 묻으려다 이것을 얻었으니 이것은 아들의 복이라 묻지 맙시다.” 했다. 공이 옳게 여겨 아이를 업고 종(鐘)을 가지고 귀가하여 대들보에 매달고 두드리니 왕궁(王宮)까지 종(鐘)소리가 들리었다. 왕(王)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서(西)쪽에 이상한 종(鐘)소리가 들리니 찾아 알아보라 하여 좌우(左右) 신하들이 집을 물어 찾아가 말하여 공(公)이 종(鐘)을 가지고 왕궁(王宮)으로 갔다. 왕이 내관(內官)에게 두드려보라 하고 이르기를 어떻게 이 석종(石鍾)을 얻게 되었는가? 하자 공(公)이 사유를 말한즉 왕이 말하기를 “기이(奇異)한 일이로다 곽거는 아들을 묻으려다 금솥을 얻었다더니 손순은 석종을 얻었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하고 명하여 종은 악부(樂府)에 소장하고 집 한채와 세급미(歲給米) 50석을 주게 하고 또 높은 벼슬을 내렸다.
이 때가 통일신라(統一新羅) 흥덕왕(興德王) 10년 을묘(乙卯) 서기 835년이다. 그리고 후에 월성군(月城君)에 봉(封)하고 묘(墓)는 모량촌(牟梁村) 앞에 있다. 사람들이 이 묘를 효자릉(孝子陵)이라 한다.
 
 
 
문효사(文孝祠)와 시조 유허지(始祖遺墟地)
 

▲ 문효공 유허지 전경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慶州市 見谷面 小見里)
천년의 정취를 풍기는 울창한 고목(古木)들이 빼곡이 들어서 만고(萬古)의 효자 문효공 할아버지의 득석종(得石鐘)의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참배하는 후손들의 할아버지에 대한 숭모(崇慕)의 정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문효사는 밀평경(密平慶) 3파의 자손들이 성금(誠金)을 모아 1997년 준공(竣工)하여 춘향제(春享祭:寒食日)에 전국에서 모여든 후손들이 향화(香火)를 올리고 있다.
 

▲ 문효사

 
 
 
뿌리 공원
 
대전 광역시 중구 침산동에 20만 3천㎡의 광활한 규모의 뿌리공원은 중구청의 계획에 의하면 2001년까지 전국 270여 성씨(姓氏)의 족보를 전시관에 전시하고 각 宗派別, 성본별(姓本別) 상징물을 전시하여 국민의 휴식처, 효(孝)의 산 교육장으로 삼을 예정이다. 많은 성씨의 상징물중에 시조공(始祖公)의 이효득종(以孝得鐘)을 상징하는 석종은 단연 참배자들의 가장 관심 어린 표징(標徵)이다.  
▲ 뿌리공원의 손씨 상징물
 
 
 
취산종골
 

▲ 취산

 
이곳 종골(鐘谷)은 손순(孫順) 할아버지께서 아들을 묻으려 하시며 사시던 곳으로 후에 집터를 홍효사(弘孝寺)라는 절을 짓고 종을 보관하였으며 지금도 삼층석탑과 절터가 남아있다.
경주시 소현면 남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