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군수공파 손동환회장외 종원들 총의를 모아 선조들이 묘역정리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2026년 4월 5일 용인뉴스 기사]
손동환회장외 종원들 총의를 모아 선조들이 묘역정리

손남호 중앙종친회장과 군수공파 손동원회장을 비롯한 종원들과 함께 시향모시고 한컷
밀양손씨 중앙 종친회 손남호 회장은 손교영 종사국장을 비롯한 임원들과 함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원금곡길 33에 위치한 군수공파 선산묘역에서 25세 諱 笈의 묘역을 비롯한 16명의 선조들의 비문앞에 군수공파 손동현 회장을 비롯한 후손들과 함께 시행 행사가 있어 참석하여 영광스럽게도 초한관에는 중앙회장 손남호가 맡았고. 아현관 손병채, 종헌관 손병수. 축관 손동원으로 구성하여 시향을 모셨다.
이날 중앙종친회 손남호 회장은 군수공파가 그동안 유적관리 및 묘역관리에 타의모법이 되고 시행을 모시는 과정에서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여할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너머나 훌륭하다고 치하드리며, 조상들에게 특히 부모님에게 잘하는 후손들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진리이니 효도로 전국에서 최고의 집안인 만큼 이를 숭회시키는 노력을 하자고 부탁드린디고 하였다.
그리고 중앙종친회와 지방종친회의 소통강화 및 상호간 발전모델을 연구하지고 하면서 서로공존하면서 밀양손씨 집안을 최고의 명문종중으로 발전하자고 다집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2002년 군수공파 문중 어르신들이 작지에 흩어져 있는 선조들이 묘소를 한곳으로 모시여 매년 4월 첫주 토요일에 전체 시향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군수공파의 내력
24世 손귀린(貴麟) 의주(宜州)목사로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목사공의 파조인 25세 손책이다. 그리고 삼남 지(智)는 진사공파(파주 장단)의 시조가 된다. 둘째 아들인 급(笈)은 군수공파 파시조로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이후 26世 子 익창(益昌)은 생원(生員), 27世 子 승업(承業)은 승사랑(承仕郎) 영암훈도(靈岩訓導)를 역임하였다.
28世 홍수(弘秀)는 승업(承業)의 一子로 字는 백화(伯華)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께 수업(受業)을 하고 학문이 높고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으나 과거(科擧)에 나가지 않았다. 주변의 추천에 의하여 경학참봉(經學參奉)을 제수받았다. 정묘년에 조정암(趙靜庵)선생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고 종부시(宗簿寺)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1774년 갑오 12월18일 卒하였다.
28세 홍립(弘立)은 승업(承業)의 二子로 자(字)는 희원(希遠)이요 호(號)는 경암(警庵) 또는 기옹(企翁)이고,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께 수업(受業)하였다. 경략(經略)과 행신(行身)이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다. 사시(賜諡)는 원촌(院村)이요 마을 뒤에다 서당(書堂)을 짓고 후진들의 교육에 몸 바쳤다. 명종(明宗) 정묘년(丁卯年)에 公과 호남(湖南)의 선비들이 조정암(趙靜庵)선생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
선조(宣祖) 갑신년(甲申年)에 도백(道伯)의 추천으로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에 제수(除授) 되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갑술년(甲戌年)에 公은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선생과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선생 두 분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를 흠모하여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모시기를 윤오은(尹梧隱) 오사호(吳沙湖)등과 뜻을 같이하여 충현사(忠賢祠)를 지었다.
1781년(정조5, 신축)에 도내(道內) 사림(士林)의 공(功)을 추모하는 선비들이 연명(連名)하여 충현사에 公을 모시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복(光復)후 1975년 을묘에 다시 공의(公議)에 부쳐져 비로소 충현사에 봉안(奉安)되셨다.
33世 희(禧)는 公의 휘는 희(禧)요 字는 수백(受百)이며 號를 원촌(院村)이라 하는데 밀양인(密陽人)이다. 상조(上祖)의 휘는 순(順)이며 시호(諡號)를 문효(文孝)라 하며 증조(中祖)는 휘 긍훈(兢訓)이요 광리군(廣理君)에 봉(封)해졌고 몇 대 지나 휘 빈(贇)은 광록대부(光祿大夫) 밀성군(密城君)이며 또 몇 대 지나 휘 급(笈)은 문과(文科) 영천군수(永川郡守)다. 이 분이 생원 익창(益昌)을 낳았으며 이 분이 낳으신 휘 홍수(弘秀)는 박학경술(博學經術)하여 경학참봉(經學參奉)을 제수(除授)받고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로 승진(陞進)하였는데 公의 오대조이다. 이 분이 휘 형로(亨老) 호(號) 은재공(隱齋公)의 아버지이다.
公은 영조(英祖) 기유년(己酉年)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상(氣像)이 훤칠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났으며 어버이께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섬기고 복종함이 남달랐다. 일찍이 문명(文名)을 얻어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정조(正祖) 때에 이르러서야 복시(覆試)에 응시하여 장원(壯元)을 하였다. 임금께서 크게 칭찬하고 전교(傳敎)하시기를 "무장(茂長)의 손희(孫禧)는 비록 늙었으나 붓끝은 늙지 않아 장원(壯元)을 하였으니 애석(哀惜)한 일이다"하고 주사(主司)의 주(珠)는 심히 놀라운 일이라 하여 두 차례 상시(上試)한 글을 추고(推考)를 한 사실이 무장읍지(茂長邑誌)에 나와 있다.
무진(戊辰) 2월 3일에 졸(卒)하니 일향(一鄕)이 개탄(慨歎)을 금치 못한 가운데 무장일동면두보장(茂長一東面杜保障) 묘좌(卯坐)에 장사를 모셨다. 공(公)의 오대손 규영(圭榮)이 그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나에게 와 부탁하기를 나의 고조(高祖)께서 내린 유훈(遺訓)이나 언행(言行)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끌어온 지 백여 년이 넘도록 전해온다 하거늘 내가 졸문(拙文)임을 들어 사양하였으나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붓을 들어 군자(君子)의 명성(名聲)은 영원하리라 하고 이와 같이 적노라.

37世 규일(圭鎰) - 현 군수공파 손동환 회장 증조부는 字는 평여(平汝), 號는 청계(淸溪)이다. 1846년(헌종 12) 병오 1월 11일 에 태어났다. 3대 독신(三代獨身)이었다가 公에 이르러 비로소 세 아들과 딸을 두었다. 음통정대부(蔭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천성(天性)이 순후(純厚)하여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양조모(養祖母)의 병환을 수년 동안 수발하였고 임종(臨終)에 가깝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고 장사 지낸 뒤 여묘(廬墓)살이를 하니 세상 사람들이 손효자(孫孝子)라 하였다.
이 사실이 송사집(松沙集)에 기록되어 있다. 丙寅 8월 30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해리면 궁산치 구항리(海里面 弓山峙 狗項里) 뒷등 임좌(壬坐)이다.
38世 봉현(奉鉉) - 손동환 회장의 조부인데 字는 영문(永文), 號는 후청(後淸)이다. 1880년(高宗 庚辰) 7월 22일生으로 숭릉참봉(崇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어버이께 효성(孝誠)이 지극하였음이 송사지(松沙誌)에 실려 있다. 1940년 5월 14일 졸하였다. 墓는 고창군 상하면 포강(高敞郡 上下面 浦江) 동쪽자락 검산 선로(劍山 先路) 아래 묘좌(卯坐)이다
39세 순배(淳培) - 손동환 회장의 부친의 字는 균택(均澤)이요 號는 금재(錦齋)이며 1906년(光武)丙午10월11일생이다. 성품(性稟)이 따뜻하고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돈독하고 조상을 받들고 후손들을 잘 길렀으며 몸가짐이 근검(勤儉)하고 집안을 법도(法度) 있게 다스리며 자손들을 올바르게 교육하였다.

40世 一子 동환(同桓) 손동환 군수공파 회장은 고창에서 충현사를 공(公)의 윗대 할아버지 경암공(警菴公)께서 창건(創建)하셨다. 1781년(신축년 정조 5년) 사림(士林)과 직장공(直長公)이 충현사(忠賢祠)의 사액(賜額)을 받기 위해 수없이 서울을 드나들었는데 광복(光復) 뒤에야 乙卯年에 그 뜻을 이루었다. 2001년 辛巳 9월 24일 졸(卒)하시니 상하면 만산리 뒷등 유좌(酉坐) 쌍봉에 석물(石物)이 있다. 현재 종원들과 함게 지역내의 명문밀양손씨의 가문을 빛내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