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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손남호회장, 지방소통강화 당진 명천공파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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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3-20 08:18 조회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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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19일 용인뉴스 기사]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손남호회장, 지방소통강화 당진 명천공파 찾아
 
 
 
 
밀양손씨 명천공파 당진에서 입향조 손휘 윤생공 묘소 배향한다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두문불출하여 절개를 지킨 선조의 얼을 기렸다
admin_062649.png 손남호 2026-03-1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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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공 묘소를 비롯한 선조들의 제향을 모시는 재실과 묘소전경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손남호회장은 지난 3월 19일 종사국장 손교영과 함께 충남 당진의 명천공파 문중을 찾아 지방종친회와 소통사업을 실시하였는데 안내는 손인권 고문이 94세의 고령에도 명천공의 묘소를 안내하였다. 명천공파는 손부승회장을 중심으로 후손들에게 전국에 있는 선열들의 뿌리찾기 사업을 매년 실시하는 명문 종파이며 손인권 고문은 매년 고려통일대전 시향에 손긍훈 중시조를 비롯한 고려충신을 모시는 고려역사선양회를 만드는데 참여하였고 고려충신 과 관련된 고려조, 조선조의 역사서와 가문의 족보와 문집 등을 고증하는데 기여한 종친 어르신이다‘

명천공파 손부승 회장은 매년 (음 10월 10일) 10시 충남 당진시 고대면 대촌리 선영내 의추재에서 명천공파 종인 60여명이 모여 시제를 모시는데 위 시제는 명천공파 회장 손부승의 18대 선조이신 30세 손 휘 윤생공과 배 숙부인 곽씨를 중앙 제단에 신위를, 좌우에 명천공의 父, 祖父(두문동 72인 孝貞), 증조부등 20위의 신위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행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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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공파 종친회를 이끌어가는 임원 명단은 회장 손부승, 부회장 손대동. 손현창. 고문으로 손인권, 손홍동, 감사 손원세. 손연동 재무 손인구, 총무 손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사들은 명천공 아래 5개 소문중으로 번창하였는데 각 파의 대표 3인을 이사로 선임하였는데 한천파 이사 손명승, 손덕원, 손승남, 시동파 이사 손정훈, 손연동, 손해승. 대촌파 이사 손강원 손성천 손경수, 당산파이사 손인홍, 손종천 손민제. 송정파이사 손병배, 손민세, 손춘세 등 25명으로 종회 임원단을 구성하여 종들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문중발전을 도모한다는 숭고한 뜻을 받들어 종회를 운영하고 있다,

1994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고려역사선양회에서는 고려조, 조선조의 각종 역사서와 각 가문의 족보와 문집 등을 고증하여 가장 공통된 인물만을 선별하여 고려대전 충신각에는 정몽주(鄭夢周), 조의생(曺義生), 손효정(孫孝貞) 포함한 250현을 배위하여 봉안했다. 손효정은 좌윤의 벼슬을 하였고 항절실 항절반 (34현)에 포함된 인물인데 이를 기리게 만드는 고려대전을 만들당시 중앙종친회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젊음을 바쳤던 손인권 고문이 이번 지방 방문시 접견행사에 동참한 분으로 존경을 받는 중앙종친회 고문이시다

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 또는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은 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전하는 72인의 유신(遺臣)들을 가리킨다. 공자가어와 사기는 공자의 승당제자를 72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동국 18현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이며, 두문동칠십이현은 근대화 이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절개(節槪)와 충(忠)의 표상이었다.

이처럼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인 성석주(成碩周, 1649~1695)가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가문 내에 전해지다 순조 1809년 간행되었고, 고종 때 사헌부 장령 성대진(成大璡)이 두문동실기를 증보한 《두문동실기(병)속록(杜門洞實記(幷)續錄)》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이 후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원래, '두문불출'이란 말은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마천의 《사기》 권68 상군열전 '公子虔杜門不出已八年矣'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현대에서는 방문을 나서지 않는 사람을 두문불출한다고 한다.

명천공 손윤생은 통정대부 충청관찰사로서 이시애의 난을 당하여 충청도의 수군을 전선에 진격시키려 하였으나 기일을 놓쳐 문책당하였는데 本島水使(본도수사)가 판서 박원형등 윗선에 호소하여 억울함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벼슬을 더 이상 할 의향이 없어 관찰사를 사직하고 관찰사 재직시 당진지역 명천의 맑은 샘물을 보고 감탄하여 낙향하여 후학양성에 노력하였다.

명천공의 후손은 번창하여 충남 당진에 세거지를 두고 발전하였으며 충청 태안 이원면, 예산 신양면, 양주 진접읍, 논산등에 집단 세가를 이루어 살고 있다. 의추재는 명천공의 공덕을 기리기 위햐여 명천공의 11세손 경(璟)이 1847년에 제각을 짓고 1905년 후손 손인식(孫寅植)이 중수하여 이어져 오고 있어 공의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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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천공파 주요 인명록

27世 좌윤(左尹)공 효정(孝貞)의 신도비명을 요약하면

고려의 의로운 신하인 중정대부(中政大夫) 삼사좌윤(三司左尹) 남은(南隱) 손효정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슬픔과 한을 품고 양주(楊州)에 은거하였다.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남쪽 고향의 맑은 바람과 높은 절개를 지키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선생의 諱는 효정(孝貞), 字는 양지(養志), 호는 남은(南隱)이다. 시조이신 신라 월성군 휘 순(順) 문효공(文孝公). 중시조 휘 긍훈(兢訓) 대광사도(大匡司徒) 벽상공신(壁上功臣)의 후손이다. 휘 숙재(淑才)는 국자진사(國子進士)요 조부 휘 승명(承明)은 민부상서(民部尙書)였으며, 아버지 휘 송백(松栢)은 조산대부(朝散大夫) 남포감무(藍浦監務)를 지냈다.

선생은 13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중정대부 삼사좌윤에 이르렀다. 고려 국운이 다하자 통곡하며 물러나니, 어찌할 수 없는 천운이었다. 스스로 고려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조선 조정의 부름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태조(이성계)가 여러 번 불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절개를 지켰다. 선생의 풍모는 높고 멀어 그 응답이 정중하면서도 단호하였으니, 소나무가 눈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조상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려 노력했고, 전조(고려)의 업적을 잊지 않았다. 세상과 거리를 두며 도(道)를 닦았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 이치를 깨우쳤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의 가르침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으며, 일상에서도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가족으로는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부사 집(緝)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 경(景) - 군수 차남: 유(幼) - 고원(高原)군수 삼남: 사(俟) - 평택감무 예조판서 사남: 우(佑) 딸은 평양 조한(趙翰)에게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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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銘) 의 글을 보면 "밀양의 화려한 가문에서 충의의 기운을 이어받아, 일찍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의 도리를 닦았도다. 나라가 기운 뒤에도 그 절개는 맑고 깨끗하여 서리와 눈 속에서도 변치 않는 소나무와 같았네. 선생의 높은 덕은 천 년 뒤에도 영원히 빛나 마땅하니, 이 비석을 세워 그 자취를 영구히 보존하노라."

좌윤공은 고려 충신으로서 파주의 고려대전에 중시조이신 광리군, 밀성군과 함께 배향되어있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으로 모셔져 있다.

다음은 파시조인 29세 명천(明泉)공 윤생(潤生)

공의 휘는 윤생(潤生)이요 字는 신지(身之)니 좌윤(左尹) 휘 효정(孝貞)의 손자(孫子)다. 타고난 성품(性稟)이 순박(淳朴)하며 영민(英敏)하고 학문(學問)이 풍부(豊富)하여 1456년 世祖 丙子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이르러 당진(唐津)을 순찰(巡察)할 때 샘물이 맑고 깨끗하며 나무가 울창하여 그곳에 정자(亭子)를 짓고 스스로 이름을 명천(明泉)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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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동굴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천을 이룰만큼 맑고 많아 천을 만든다하여 명천이라는 터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본도수군(本道水軍)이 풍파(風波)로 인하여 기한(期限) 안에 진군(進軍)하지 못하자 공(公)의 통솔(統率)의 잘못이라 하여 수사(水使)의 직책(職責)에 대한 문책(問責)을 당하였으나 판서 박원형(判書 朴元亨)과 참판 황보신(參判 黃保身)이 무고(無辜)하다는 장계(狀啓)를 올려 사면(赦免)을 받고 공직(公職)에서 물러나 당진(唐津)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은둔(隱遁)하였다.

34世 충의(忠義)공 응시(應時)

공(公)의 휘는 응시(應時)요 자(字)는 태술(太術)이며 호(號)는 의암(義菴)이시다. 공(公)의 칠대조(七代祖)는 휘 효정(孝貞) 삼사좌윤(三司左尹)이시다. 고조(高祖)의 휘는 명천공 윤생(潤生)인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에 이르고 증조(曾祖) 휘 확(確)은 전략장군 행용양위부호군(定略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이요 조부(祖父)는 휘 희증(熙曾)이니 장수현감(長水縣監)이요 아버지는 휘 욱(煜)으로 통덕랑(通德郞)이며 어머니는 공인파평윤씨(恭人坡平尹氏)로 부사수근(府使秀根)의 따님이시다

公은 1540년에 태어나셨으며 어려서부터 남다른 천성으로 학문에 힘써 경전과 사략과 제자서(諸子書)를 통섭하셨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때때로 무술을 연마하여 문무를 겸비한 장략이 있더니 임진왜란을 당하여는 백의한사(白衣寒士)로 분연히 의기(義起)하여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으니 인근에서 뜻있는 분들이 잇따라 모여 들어 수일 동안에 무리를 이룬지라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호남의 적세(敵勢)가 강성함을 듣고 공주를 거쳐 전주에 이르러 싸움마다 승전하니 적이 公의 장재(將材)가 뛰어남을 알고 백방으로 항전하다가 마침내 대군(大軍)으로써 갑자기 공략하여 중과부적으로 진중(陣中)에서 전몰(戰歿)하시어 체백(體魄)을 수렴(收斂)하지 못하여 초혼(招魂)하여 당진군 고대면 대촌리 대봉산 축좌(丑坐)에 예장(禮葬)하였으며 당진현감 김극겸(金克謙)의 제문(祭文)에 公은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으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앞장 서서 의병을 일으켜 백의종군으로 전쟁터에 뛰어들어 충성을 다하고 시석(矢石)에 희생되셨으니 그 충절의 빛남과 절의가 더욱 돋보인다고 하였다.

1597년 丁酉 9月상한(上澣)이다.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받고 가선대부와 충의(忠義)의 시호를 증직 받았다. 배위 정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부사(府 使) 계손(季孫)의 따님이다. 생졸은 전하지 않으며 묘소는 공묘 합폄인데 후손들이 영체하여 고향을 떠나 산거하여 실묘하였으므로 1988년 戊辰 청명절(淸明節) 다시 초혼(招魂)하여 자손들이 새거하는 이곳 예산군 신양면 차동리 방곡(芳谷) 壬坐에 합장으로 예장하고 상석과 묘비를 월성최병무(月城崔秉武)가 비명(碑銘)을 써서 모셨다.

충모사(忠慕祠) 송모재(松慕齋)를 건립하여 매년 음 10월 12일에 충모사(忠慕祠)에서 향사를 모신다. 순사보국(殉死報國)으로 훈충대의(勳忠大義)의 위업을 천추에 추모키 위하여 충의공파 세천지지(忠義公派 世阡之地)인 예산군 신양면 차동리 송정동 입구에 충의공신도비(忠義公神道碑)를 세우고 우리 후손들이 힘을 다하여 선영을 대대로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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