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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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모사(崇慕祠) 준공(竣工)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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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孫 亨 錫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6-04-17 16:51 조회2,2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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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말 항절불굴(抗節不屈)의 절신(節臣)으로 해를 입으신 수주목사(樹州牧使) 휘 책(策)공의 아드님들이 신조(新朝)에 항명하시다가 전남 보성(寶城)의 적소(謫所)에 유배(流配)를 당하여 전남 보성군 노동면(蘆洞面) 금호리(錦湖里)에 정착한지 5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숙부인(淑夫人) 원주이씨(原州李氏)께서 이곳에 세거(世居)하여 대대승승(代代承承)하라고 그 이름을 대여촌(代如村)이라 하셨다니 후손들이 기만(幾萬)이 넘는 현재의 감개(感慨)는 더욱 크다 할 것입니다.
멀리 영남(嶺南)의 본향(本鄕)에서 호남(湖南)으로 이거(移居)한 목사공파 후손들은 외적(外賊)의 침탈로 국권(國權)을 잃은 1920년대에 고려를 건국하여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데 공헌하여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 광리군(廣理君)의 봉함을 받은 휘 긍훈(兢訓)공의 영당(靈堂)을 금호리 구암(龜岩)의 언덕에 모시고 나라 사랑과 숭조(崇祖)의 높은 뜻을 가다듬어 왔습니다.
연구세심(年久歲深)하여 영당이 퇴락(頹落)하여 2001年 목사공파 종친회의 결의로 이곳 삽고개(揷高盖)에 길지(吉地)를 골라 새로이 사당을 모시고 광리군과 밀성군(密城君)을 비롯하여 몇백년의 세월을 후손들의 불민(不敏)으로 실묘(失墓)의 아픔을 겪어오던 판서공(判書公) 휘 광(洸) 군사공(郡事公) 휘 영(榮)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중견(仲堅) 시중공(侍中公) 휘 약해(若海) 의주목사(宜州牧使) 휘 귀린(貴麟)의 다섯 어른을 합사(合祀)하기로 하여 2006年 3月 26日의 길일(吉日)을 택하여 준공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지만 조상(祖上)님께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헌납공(獻納公) 휘 검경(儉敬)과 부사공(副事公) 휘 유경(有敬) 그리고 은덕불사(隱德不仕)하신 처사공(處士公) 휘 계경(季敬)의 삼형제분의 후손들은 나주(羅州) 보성(寶城) 정읍(井邑)을 기반으로 전국 각지에 산거(散居)하기를 수만(數萬) 각계 각층에서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봉사(奉仕)하고 있습니다.
조선(朝鮮)조 초기에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지내시고 성종(成宗)때 15학사(學士)의 반열에 올랐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신 휘 비장(比長)과 임진왜란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왕조실록(王朝實錄)과 태조어진(太祖御眞)을 정읍(井邑) 내장산(內藏山) 용굴암(龍窟庵)으로 피난(避難)시켜 위대한 국보(國寶)를 보전(保全)케 한 한계공(寒溪公) 휘 홍록(弘祿)의 업적은 우리나라 문화사(文化史)에 길이남을 큰 업적이요 자랑거리 입니다.
왜란(倭亂)을 당하여 전선(戰線)에서 적을 무찔러 진충보국(盡忠報國)하신 수사공(水使公) 휘 응지(應智)와 승지공(承旨公) 휘 응호(應虎) 판서공(判書公) 휘 응록(應祿) 참판공(參判公) 휘 훈립(塤立)을 비롯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倡義)하신 지평공(持平公) 휘 석윤(錫胤) 옥봉공(玉峰公) 휘 후윤(後胤) 등 여러 선조(先祖)님들의 충효정신(忠孝精神)은 대(代)를 이어 조선(朝鮮)말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주도하신 손화중(孫華仲) 장군과 같은 열혈지사(熱血之士)를 배출하였습니다.
목사공파 후손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숭조목종(崇祖睦宗)의 높은 정신을 간직하고 한번 단결하여 힘을 합치니 숭모사(崇慕祠)와 같은 큰 역사(役事)에도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더우기 멀리에서도 멀다하지 않으시고 동참하여 주신 탁() 하(賀) 타() 영(榮)의 모든 집안에 큰 복(福)이 함께 하고 영광(榮光)이 영원(永遠)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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