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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화산(推火山) 고성지(古城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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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5-12-30 11:39 조회3,2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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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상으로 교동리3동에 해당하는 모례마을 서쪽 산정에 위치하고 밀양읍 성내로부터는 동쪽으로 약 2㎞ 거리에 있는데 표고 243개의 추화산 산마루의 석성(石城)을 말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추화산 고성은 산정상에 있는 석성을 말하는데 둘레가 2360척이고 그 안에 우물이 둘이 있고 못이 하나 있다”라고 하였다.

이 성의 산이름인 추화(推火)는 신라 경덕왕때 밀성군으로 바뀌기 이전의 밀양의 옛이름이다. 곧 추화란 “밀불” 또는 “밀벌”등으로 해석되고 삼한시대 이 고장의 읍락국가(邑落國家)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에 연유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밀성(密城)이란 이름도 “추화산”에서 연유된 듯하다. 그러므로 추화산 고성은 경덕왕때 이전에 있었던 성곽임을 알 수 있고 이미 3세기경에 밀양이 신라의 영토가 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라가 가야(伽倻)를 낙동강선에서 맞서 있던 시대에 쌓아진 심국시대 초기의 산성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 여지승람에는 “성황사가 추화산에 있는데 대대로 고을의 호족이었던 손긍훈이 고려 태조를 도와서 공을 세워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되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졌는데 곧 성황사신(城隍祠神)”이라고 되어있고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손긍훈장군의 방어진지”라고도 하였다. 이는 이 고성이 소위 추화산의 성황신이 된 광리군(廣理君) 손긍훈(孫兢訓)장군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신라말에 손 장군이 이 산성에서 적을 방어하였다 하였으나 그 적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인 실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밀양읍 교동리(校洞里) 춘복(春福)마을에 있는 고려공신(高麗功臣) 광리군(廣理君) 손공신도비(孫公神道碑)의 비문에 따르면 손장군은 신라말기 진성여왕(眞聖女王)때에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괴귀(怪鬼)를 바다속으로 쫓아 보냈다는 일화가 적혀있고 고려태조 왕건(王建)을 송도(松都)로 찾아가 군무(軍務)를 맡은 다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을 사로잡는데 공을 세워 고려의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어 삼중대광사도의 추증과 광리군의 봉작이 내려졌다는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손 장군의 사후(死後)에 고을 사람들이 그 훈공을 추모하여 추화산에 성황당을 모시고 사신으로 받들어 제향을 모셨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손 장군은 신라말 고려초기의 향직(鄕職)에 있었던 토호(土豪)로서 기울어져가는 신라에 대한 충성과 왕건의 고려 건국에도 협력한 인물임을 알수가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은 손 장군이 후백제를 맞아 싸운 방위진지로서 또는 당시 창궐했던 왜구를 무찔러 향토를 방위한 요새지로서 주무대가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석성은 거의 허물어져 그 자취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으나 산마루 서남부에는 폭 1.5m 높이 5m나 되는 석성의 석축이 300개정도나 남아 있는데 그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성의 둘레는 약 1㎞로 기록상의 2360척과 거의 부합되고 성안에 있었다는 우물 두 곳과 못 한군데는 확인할 수가 없다.

이 산성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는 돔형식으로 남아있는 성황사의 건물 유지가 있어 창훈각(彰勳閣)이라 하였는바 이는 추화산 사신으로 받든 광리군 손장군의 사당자리이다. 또 서북부 정상에는 봉수대(烽燧臺)로 전해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지승람에 추화산 봉수대는 남으로 남산과 호응하고 북으로 분항(盆項)에 알린다”라는 기록이 있고 산성과 봉수와의 상관관계로 보아 이 봉수대도 추화산 고성과 역사를 함께하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밀양지 442p, 4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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