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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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복재기(春福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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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5-10-28 10:08 조회2,5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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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고을 동쪽 몇리(里)쯤에 있는 추화산(推火山)이 곧 이 고을의 주산(主山)으로서 산위에 있는 현충사(顯忠祠)는 고려조(高麗朝)의 삼중대광사도벽상공신(三重大匡司徒壁上功臣)으로 광리군(廣理君)에 책봉된 손긍훈(孫兢訓)의 영정(影幀)을 모신 곳이다.

삼가 여지승람(與地勝覽)을 살펴보면 공(公)은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한 공(功)이 있어 추봉(追封)되었다고 하였는데 밀주지(密州誌)에 이르기를 “공훈과 명성이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사모하여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지금까지 향사(享祀)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사실로서 제법(祭法)에 이른바 “힘을 다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면 향사하게 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춘추(春秋)로 향사를 관(官)에서 봉행해 온지 오래였는데 갑오(甲午 1894)년 이후로 폐하여 향사하지 않다가 후손들이 서로 합의하여 예전대로 봉행하여 온지 40여년이다. 대개 밀양으로 관향(貫鄕)을 삼은 손씨(孫氏)는 모두 광리군(廣理君)을 상조(上祖)로 하나니 그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성심은 더욱 옛 전범(典範)이 폐기되고 선대의 사적이 인몰(湮沒)되는데 안타까움이 없을 수 없음이다. 사당(祠堂)은 산의 정상(頂上)에 있는데 매양 비바람으로 인하여 수차 중수(重修)하였는데도 오히려 무너질 염려를 버릴 수 없었다. 지난 갑자(甲子 1924)년 봄에 종중의 의논이 합치되어 공고하게 영원토록 보전할 목적으로 목조(木造)로 된 것을 석조(石造)로 고치고 문(門)도 또한 벽돌로 하였다.

이렇게하여 덩그렇고 환하며 실하게 되어 비바람과 조수(鳥獸)의 침해를 막았으니 이는 후손들만의 경사가 아니라 온 고을이 우러러 보게 되었다.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하여 사당은 완공되었으나 아직 재실(齋室)을 짓지 못하였으므로 제향을 모실 때면 제수(祭需)를 마련하는데 군색하고 제관(祭官)이 재숙(齋宿)할 곳이 없어서 실로 후손들이 모두 안타까워하는 바였다. 능주(綾州)의 종인 고(故) 의관(議官) 백암공(白巖公) 영렬(永烈)씨가 이 일을 서두르지 못함을 개탄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그의 명철한 아들 종채(鐘彩)군이 유지(遺志)를 받들어 특별헌금 일천원(壹阡元)을 내고 고창(高敞)의 재평(在平)군이 또한 오백원(五百元)을 출연(出捐)하여 건축비를 마련하였다. 두분의 선대(先代)를 위하는 정성에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으며 모든 우리 종족(宗族)들도 분발하여 다투어 본받는다면 조상을 받드는데 있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할 것이랴. 그래서 함께 힘 닿는대로 물자를 대고 의논하여 일을 도모하였으니 기묘(己卯)년 4월에 시작하여 몇 달에 걸쳐서 공사를 마쳤다. 재실(齋室)은 모두 오가(五架)인데 가운데는 대청으로 하고 좌우로 방을 만들어 보본(報本)이라는 두 글자의 편액(扁額)을 써서 걸어 두었으니 자손들이 추모(追慕)하여 그 덕을 보답한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여기에서 제수(祭需)를 장만하고 재숙(齋宿)하면 또한 친족들이 모여 우의(友誼)를 다질수 있으니 가히 아름답다 하겠도다. 옛적에 이루지 못한 것을 이제야 이루게 된 것은 그 또한 때를 기다림이 있음이니 두 분이 성심을 다하여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찌 당(堂)을 짓는 미거(美擧)가 성취될 수 있었겠는가. 이 또한 공경할만한 일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재실에 올라와서 북쪽으로 춘복산(春福山)의 뒤를 바라보며 송추(松楸)가 울창한 곳이 실로 공(公)의 의복과 신발을 갈무리한 곳으로서 천년토록 수호하고 삼가 향화(香火)로 끊이지 않았음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니 생각컨대 사라지지 아니한 영혼이 항상 양양하게 산의 위와 좌우를 오르내리시리라. 이 산은 태백산(太白山) 남쪽 기슭에서 남으로 六·七백리를 치닫다가 여기에 서리어 우뚝 솟은 곳이며 물은 계림(鷄林)에서 발원(發源)하여 서쪽으로 백여리를 흐르다가 도주청도(道州淸道)의 강물과 합류하여 검푸르게 고여 있듯이 앞을 두르고 있다. 우리 선조의 탁월한 공훈과 위대한 충렬(忠烈)은 산과 물처럼 높고 깊음을 상상할 수 있으며 또한 백세의 후손들이 저와 같이 오래도록 계승될 수 있음을 어찌 의심하랴. 삼가 영건(營建)의 전말과 마음에 느낀 것을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로 삼고자 한다. 불초(不肖)는 비록 창시(創始)하자는 공론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한 이는 영희(永熙) 진한(振翰) 재평(在平) 세사람이요 공영을 감독한 이는 재석(再錫) 진룡(振龍) 윤현(允鉉) 희진(熙振)등 여러 사람이다.

1939년(己卯) 7월 하순

후손 정삼품 통정대부(後孫 正三品 通政大夫)
전밀양군수 지현 근서(前密陽郡守 之鉉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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