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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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孫秉熙)선생과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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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5-10-28 10:08 조회2,7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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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국제관계와 시대조류에 적응하여 민족교육의 선구적 역할까지 겸해 온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청원군(淸原郡) 북이면(北二面) 대주리(大周里)에서 청주관청의 서리(書吏)인 손의조(孫懿祖)와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응구(應九) 또는 규동(奎東)이라 하였으며 성인(成人)이 되어 병희(秉熙)라 불렀다.
별호(別號)를 소소거사(笑笑居士)라 하였고 의암(義菴)은 36세 되던 해 천도교(天道敎) 제2세 교주(敎主)인 최시형(崔時亨) 선생에게서 받은 도호(道號)이다.


의암선생은 동학(東學)의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창교정신(創敎精神)에서 자기의 이념적(理念的) 행로(行路)를 발견하고 22세되던 1822년에 동학에 들어가 수도자(修道者)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의암은 입교한지 2년만에 교주 최시형선생을 만나게 되었으며 최시형은 의암의 인격이 비범함을 보고 수제자(首弟子)로 삼았다. 제3세 교주(敎主)가 된 의암은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평소부터 국제정세의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여 온 의암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원칙에 고무되어 최린, 권동진, 오세창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사항을 협의하였다.

송진우, 최남선 등과의 제휴와 기독교(基督敎), 불교(佛敎)등 모든 종교계(宗敎界)와 제휴함으로써 2월 중순경에는 학생층까지 합류시킨 3·1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여 통일전선을 완료하였으며 독립만세운동의 방향은 최린의 제의대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에 두고 이 3대원칙을 근간(根幹)으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발원을 천명한 독립선언서는 최남선(崔南善)에게 위촉하여 기초작성(起草作成)되었고 그것은 곧 2만1천장이 인쇄되어 전국 각지로 전달되는 등 독립운동 전야(前夜)까지에 모든 거사준비가 무사히 진행되었다.

드디어 1919년 기미년(己未年) 3월 1일 정오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첫 함성(喊聲)과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만세의 절규는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되어 이후 수개월에 걸쳐 민족의 피어린 독립만세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렇게 뿌려진 독립운동의 씨는 멀리 해외에 있는 망명지사(亡命志士)등의 피어린 독립운동으로 연장되었다. 의암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어 2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르던 중 병보석(病保釋)으로 출감(出監)하여 상춘원(常春苑)에서 1922년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였다.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던 선생은 사후(死後)에 유산(遺産)이라고는 한푼도 없었으니 그는 참으로 의(義)에 살고 의롭게 가신 분이며 묘지(墓地)는 수유리(水愉里)에 있는 천도교 수련장인 봉황각(鳳凰閣)의 녹지(綠地)에 안장되었다.

의암선생이 탄생하신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에는 그를 기념할 아무런 흔적이 없었는데 1961년 충청북도 문화재보존회(文化財保存會)는 선생의 탄생 일백주년을 기념하고 대의(大義)를 밝히기 위하여 이곳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으며 청원군(淸原郡)에서는 선생의 생가(生家)를 복원(復元)하고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이곳을 3·1정신이 길이 후손들에게 계승(繼承)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유허지(遺墟地) 정비사업을 지난 1991년에 착공(着工)하여 넓은 광장과 생가(生家) 그리고 동상(銅像)을 건립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후손(後孫)들에게 애국(愛國)의 산 교육장(敎育場)으로 활용하고 있다.

1962년에 선생의 애국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하여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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