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종친회회보

고대 손씨 선조민(孫氏 先祖民) 탁족(?族)에 대한 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손한종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2-08-30 10:32 조회3,030회 댓글0건

본문

<전호에서 계속>
여기서 한(韓)이라함은 중국정사 조선전(中國正史 朝鮮傳)에서 「한(韓)은 한국민족(韓國民族)을 중국인(中國人)들이 지칭(指稱)했던 「예(濊) 맥(貊) 한(韓)을 이르는 개념(槪念)으로」 한인(韓人)들은 「지역적(地域的)으로 북(北)쪽에 살던 우리 민족(民族)들을 예(濊) 맥(貊)이라 지칭(指稱)한 것처럼 「남(南)쪽에 살던 우리민족(民族)들을 한(韓)이라 지칭한 것이다.
이 경우(境遇) 자칫 한(韓)이라는 사회(社會)가 북(北)쪽의 예맥(濊貊)과 종족적(種族的)으로 문화적(文化的)으로 크게 구별(區別)되는 사실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 하겠다.
윤희병(尹熙炳)선생은 그의 저(著) 한민족(韓民族)의 상고사(上古史)에서 연(燕)나라에 대하여 「조선왕(朝鮮王) 만(滿)이라는 자(者)는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다」하고 다시 「연(燕)나라가 비로소 생길때 부터 진번조선(眞番朝鮮)에 속하는 땅이었다」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진한(辰韓)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避難)온 곳」이 아니고 「고조선(古朝鮮)사람이 피난(避難) 온곳」임을 알 수 있고, 최치원선생(崔致遠先生)이 잘못 말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 손씨선조민(孫氏先祖民)은 고조선(古朝鮮)에서 한반도(韓半島) 진한(辰韓)땅에 이주정착(移住定着)한후 이미 서기 32년 신라 유리이사금 9년 임진(新羅 儒理尼斯今 九年 壬辰)봄 부터 손씨(孫氏)라는 성(姓)을 사성(賜姓)받고 씨족명칭(氏族名稱)을 사용(使用)하게 되었음에도 국가적(國家的) 체면에 관계되는 일 이외는 신라이전(新羅以前)의 사회에서는 관습상으로 성(姓)을 부르지 않고 다음과 같은 고조선식(古朝鮮式)진한(辰韓)의 방언(方言)으로 이름을 부르고 으 이름 앞에 탁부(?部), 탁(?)등의 고조선(古朝鮮)의 고향부락(故鄕部落)과 강수명(江水名)을 붙이고 이름뒤에 각종(各種) 존칭(尊稱)을 붙여서 성명(姓名)이 보편적(普遍的)으로 통용(通用)된 것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五. 고대 손씨선조민 (古代 孫氏先祖民)의 고향(故鄕)
가. 고조선(古朝鮮)의 탁수지방(?水地方)
탁수(?水)는 어느 곳에 있는 땅이며, 그 위치(位置)는 어디인지? 그리고 언제 어떤 연유(緣由)로 우리 손씨선조(孫氏先祖)들이 그곳 탁수(?水)에서 살기 시작 하였고, 탁수(?水)에서 얼마나 살다가 언제 탁수(?水)를 떠나서 어떤 경로로 한반도(韓半島) 동남단(東南端)의 진한(辰韓)땅 까지 내려와 살게 되었는가?
탁수(?水)는 중국본토(中國本土) 서북부(西北部)의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城) 및 하남성(河南省) 경계지역(境界地域)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곳에 있으며, 동쪽과 북쪽으로 흐르는 황하(黃河)와 위하(渭河)로 갈라지는 위수분지(渭水盆地)에 황하지류(黃河支流)로 흐르는 강물이 있는데 이곳이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 우리 손씨선조민(孫氏先祖民)들이 살았던 고조선(古朝鮮)의 고향땅 탁수(?水)라는 곳이다.
이곳 탁수(?水)는 중국의 고대국가였던 진(秦)나라, 한(漢)나라, 진(晋)나라, 수(隋)나라, 당(唐)나라의 역대(歷代) 도읍지(都邑地)였던 서안(西安)의 동쪽이요 고조선(古朝鮮)이 한(漢)나라의 침공(侵攻)을 대비(對備)하여 축성(築城)한 한성(韓城)의 근방(近方)이고, 후한(後漢)의 도읍지(都邑地)였던 낙양성(洛陽城)의 서쪽에 있으며, 황하(黃河) 이북의 산서성대동부(山西省大同府)의 옛 탁록평원(?鹿平原)에 접(接)한 일대의 지역으로 일반적으로 탁수(?水)라는 지방(地方)은 중국(中國) 섬서성(陝西省) 서안지방(西安地方)을 말하기도 한다.
이곳 탁수(?水)에 손씨 일운 탁부 혹은 탁(孫氏一云 ?部或?) 선조민(先祖民)들이 이주(移住)하여 정착(定着)하여 살게 된 연유(緣由)에 대하여 손창린(孫昌麟) 전(傳) 「기원전(紀元前) 2706년 을묘(乙卯)에 배달한국(倍達韓國) 고조선(古朝鮮) 제14세 환웅 자오지 치우천왕(慈烏支 蚩尤天王)께서 염제 신농씨가(炎帝 神農氏家) 유망(楡罔)의 정치(政治)가 쇠퇴(衰退) 하였으므로 큰 뜻을 품고 친척중(親戚中)에서 장수 81인(將帥 81人)을 선발(選拔)하여 갈로산(葛盧山)에서 철(鐵)을 케어 제련(製鍊)하여 창(槍)과 투구(鬪具)를 제조(製造)하고 천병(天兵)을 발동(發動)하여 1년동안에 9제후(諸侯)의 영토(領土)를 함락(陷落)하고 다시 무기를 정비하고서 공상(空桑)을 점령(占領)하는 등 그 당년(當年)에 12제후국(諸侯國)을 합병(合倂)해 버렸다.
그랬더니 한족(漢族)의 황제(皇帝) 헌원(軒轅)(漢族들이 스스로 中國의 始祖 로추앙)이 병마(兵馬)를 이끌고 와서 대항(對抗)하여 공격(攻擊)을 가(加)함으로 고조선 치우천왕군(古朝鮮 蚩尤天王軍)과 중국측한족(中國側漢族)의 황제군(黃帝軍)이 탁록광야(?鹿廣野)에서 일대결전(一大決戰)이 전개(展開)되었다.
이때 배달한국(倍達韓國)의 제14세환웅(桓雄) 자오지 치우천왕(慈烏支 蚩尤天王)의 친위군대(親衛軍隊)가 탁록(?鹿) (中國山西省大同府)들판을 급속(急速)히 선제포위(先制包圍)하여 격파(擊破) 함락(陷落)시키고 큰 안개 돌바람을 일으키니 중국측(中國側)의 한족(漢族)의 시조(始祖) 황제 헌원군(皇帝 軒轅軍)이 패주(敗走)하는지라 고조선 치우천왕군대가 맹추격(猛追擊)하여 공격을 멈추지 않자 한족(漢族)의 황제 헌원(皇帝 軒轅)이 평화적 협상(平和的 協商)을 제의(提議)해 왔다.
그리하여 배달한국(倍達韓國) 자오지 천왕(慈烏支 天王)께서는 황하(黃河)를 남북(南北)으로 국경선(國境線)을 양분(兩分)하고 중국측 한족(漢族)과 황제군(黃帝軍)을 황하이남(黃河以南) 땅으로 추방하고는 황하(黃河) 이북의 광활한 모든 땅을 고조선(古朝鮮)의 영토(領土)로 확장(擴張)하였던 것이다.
중국대륙(中國大陸)의 황하이북전체(黃河以北全?)가 고조선(古朝鮮)의 영토가 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고조선(古朝鮮)의 영토(領土)를 중화대륙(中華大陸)에서 황하선(黃河線)까지 확장(擴張)한 환웅(桓雄) 자오지 치우천왕(慈烏支 蚩尤天王)은 곧바로 배달한국(倍達韓國) 고조선(古朝鮮)의 도읍을 청구(靑丘)로 천도(遷都)함과 동시에 탁록(?鹿)에 성(城)을 쌓고 도시(都市)를 만들고 회대(淮垈)(垈山泰山)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강소성(江蘇省), 안휘성(安徽省) 일대(一帶)에 집들을 건축(建築)하고 탁록(?鹿) 일대(一帶)에 까지 한족(韓族)의 고조선민(古朝鮮民)을 이주(移住)시켜서 살도록 하였으니 이때(BC 2706)부터 진한6부족(辰韓6部族)과 손씨선조민(孫氏先祖民)들이 탁수(?水)땅에 옮겨 살게된 연유(緣由)였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우리 손씨선조민(孫氏先祖民)들은 기원전 2706년 부터 기원전 707년경 까지 1999년간(年間) 이곳 탁수지방(?水地方)에 산 것같다.
그러던 손씨선조민(孫氏先祖民)들은 지나대륙(支那大陸)에서 기원전 707년 이후 부터 제후(諸侯)들이 대립항쟁(對立抗爭)하는 춘추전국시(春秋戰國時)가 접어들면서 대륙(大陸)에서 살육지난(殺戮之亂)이 벌어지자 단군조선(檀君朝鮮) 35세단군(檀君) 사벌대왕66년(沙伐大王 66年)갑술 기원전 707년(甲戌 紀元前 707年)에 조을(祖乙)대장군의 고조선군단(古朝鮮軍團)이 연경(燕京)의 도성(都城)을 공략(攻略)하고 산동성(山東省)의 제(齊)나라 군사(軍士)를 격파(擊破)하고는 탁수(?水)와 탁록(?鹿)으로 진주(進駐)하였다가 동북(東北)의 진조선(眞朝鮮)의 수도(首都) 하루빈(哈浜) 소밀랑성(蘇密浪城)으로 개선(凱旋)하면서 현지(現地)에 있던 동족(同族)과 동포(同胞)를 데리고 귀국(歸國)하게 되니 우리 부족(部族)과 손씨선조민(孫氏先祖民)인 탁부(?部) 탁족(?族)들은 2천년간 즉 기원전 2706년 을묘(乙卯) 배달한국 14세 환웅(倍達韓國 14 桓雄) 자오지 치우천왕(慈烏支 蚩尤天王)때 부터 기원전(紀元前) 707년 갑술(甲戌) 단군조선 35세 단군(檀君朝鮮 35檀君) 사벌대왕(沙伐大王)때 까지 1999년간 살면서 정(情)들었던 지나대륙(支那大陸)의 고향 탁수(?水)땅을 떠나서 동북만주(東北滿洲)의 진한(辰韓) 진조선(眞朝鮮)으로 이주(移住)하여 왔다고 전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