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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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現代)의 명필(名筆) 소전 손재형(孫在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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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5-09-14 10:56 조회3,4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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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휘(諱)는 재형(在馨)이요, 호(號)는 소전(素?)이며 당호(堂號)를 봉래(蓬萊)라 하였다.
목사공(牧使公) 휘 책(策)의 18세 손으로 전남 진도군 의신면에서 태어났다. 조부(祖父)는 옥전공(玉田公) 병익(秉翼)이며 아버지 휘 영환(寧煥)은 요절(夭折)하여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1903년 계묘(癸卯) 4월 28일) 할아버지 옥전공(玉田公)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한학(漢學)과 서예(書藝)를 배웠다. 자라면서 학문(學問)이 뛰어나고 특히 서예에 재주를 발휘하여 1925년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養正高等普通學校) 재학중(在學中)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서 예서(隸書)와 해서(楷書) 부문에 입선하였고 1929년 제8회 미술전시회(美術展示會)까지 오체서병(五體書屛: 篆隸楷草)이 입선(入選)한 서예계(書藝界)의 천재였다.
1929년에 외국어학원(外國語學院)을 수료한 뒤 경성제이고보(京城第二高普)의 교사(敎師)를 지냈고 1947년에는 진도중학교(珍島中學校)를 설립하여 이사장(理事長)으로 향토(鄕土)의 후학양성(後學養成)에 심혈을 기울였다.

건국(建國) 후 제1회 국전(國展)에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향토(鄕土)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결과로 제4대 민의원(民議院)에 당선되어 문공분과위원회(文公分科委員會)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공(公)은 성품이 청순(淸淳)하여 바쁜 일상생활(日常生活)중에도 늘 서예(書藝)에 정진(精進) 삼매(三昧)에 몰입하여 많은 작품(作品)을 남겨 사계(斯界)의 칭송(稱頌)을 한몸에 받았다. 숭조목종(崇祖睦宗)의 정신이 투철하여 위선(爲先)에도 늘 앞장 섰으며 종중의 후진(後進)들을 지도하는데 성심(誠心)을 다하였다.

1971년에 제8대 국회의원(國會議員)에 당선되어 재선(再選) 의원이 되었다. 제5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회장에 피선(被選)되어 국보심사위원(國寶審査委員)으로 한국문화의 고전(古典) 발굴에 커다란 공적(功績)을 남겼다. 특히 종사(宗事)에 큰 업적(業績)으로 전국손씨화수회(全國孫氏花樹會)를 창립하여 밀평경(密平慶) 3파(派)가 한분의 시조(始祖)를 받들고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아름다운 전통(傳統)을 지키며 뿌리를 다지고 줄기를 영원히 보전(保全)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여 한 동아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공(公)의 화려(華麗)한 생(生)을 뒷받침 하는데는 어머니 원주이씨(原州李氏)의 각고(刻苦)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부군(夫君)을 일찍 사별(死別)하고 청상(靑孀)의 몸으로 시부모님을 받들고 집안의 아랫사람들을 잘 다스려 가세(家勢)를 진작(振作)시키며 어린 남매(男妹)를 훌륭하게 훈육(訓育)하여 사회(社會)에 공헌하겠끔 하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밑받침이 되어주었다.

부인(夫人) 풍산홍씨(豊山洪氏)와의 사이에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었는데 용(龍) 량(亮) 홍(鴻)이고 사위는 사천(泗川) 목종하(睦鍾夏)이다. 1981년 5월 13일에 생(生)을 마치니 경기도 시흥시(始興市) 청계(淸溪) 입구의 중턱 유좌(酉坐)에 잠들어 계신다.
생전(生前)에 사회와 국가에 공헌한 공로로 국민훈장모란장(國民勳章牧丹章)을 수상(受賞)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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