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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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은(楚隱) 손공(孫公) 휘 승경(承憬) 유사장(遺事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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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5-09-02 17:21 조회3,0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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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휘는 승경(承憬)이며 자(字)는 사오(士悟)요 호(號)는 초은(楚隱)이니 밀양(密陽)의 계출(系出)이다. 득성조(得姓祖)의 휘는 구례마(俱禮馬)니 육부대인(六部大人)의 한 분이다.
신라(新羅)로부터 명공대작(名公大爵)이 찬란하게 이어져 왔다. 휘 책(策)은 문과목사(文科牧使)로 휘 계경(季敬)을 낳았는데 은덕불사(隱德不仕)하였고 아들 의화(義和)는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그 아들 휘 민(敏)도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 분이 휘 비장(比長)을 낳으니 호(號)를 입암(笠巖)이라 하며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올라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는데 즉 공(公)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 휘 세기(世基)는 덕릉참봉(德陵參奉)이요 조부(祖父) 휘 중로(重老) 는 충순위(忠順衛)요 선고(先考)의 휘는 홍적(弘績)인데 문과한림(文科翰林) 대교(待敎)다 을사사화(乙巳史禍)때 안명세(安名世)와 같이 사국(史局)에 재임(在任)하면서 직필(直筆)로 시국(時局)을 기록하다가 간신(奸臣)들에게 참소되어 평안도(平安道)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졸하였다. 선조(宣祖) 三년(庚午)에 신원(伸寃)되고 관직(官職)도 복관(復官)되어 부안(扶安) 옹정서원(雍井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비(?)는 공인(恭人) 우주황씨(紆州黃氏)로 진사(進士) 언규(彦珪)의 따님이다. 정숙(貞淑)하고 온화(溫和)하며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었다. 중종(中宗) 三十五년(庚子)에 부안(扶安)의 요촌(蓼村)에서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천품(天稟)이 고상(高尙)하고 재주와 지개(志慨)가 뛰어났다. 약관(若冠)에 종숙(從叔) 한계공(寒溪公)과 함께 일재(一齋) 이선생(李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니 선생이 뒷날 큰 인물이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사화(史禍)이후에 마음에 원통함을 간직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초산(楚山)의 동쪽에 은거(隱居)하며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받들고 세상에 출세(出世)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있었더니 선조(宣祖)조에 참봉(參奉)벼슬로 여러차례 출사하기를 권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임진왜란에 왜적이 전주성(全州城)을 침범하려 함으로 당숙 한계공(寒溪公)과 물재(勿齋) 안공(安公)과 더불어 조경묘(肇慶廟)의 어진(御眞)과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내장산(內藏山) 용굴암(龍屈庵)으로 옮기고 조중봉(趙重峰)이 금산(錦山)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두 분에게 의논하며 「어진(御眞)등의 봉안은 두 분께 맡기겠으니 힘써 주소서」하고 의병(義兵) 수천명을 모아 양성(陽城)에 이르러 적(賊)과 만나 역전(力戰)하다가 순국(殉國)하였다. 이에 집안의 하인 차곡석(車曲石)과 이오금(李惡金)등도 공(公)의 순절(殉節)을 보고 모두 적과 싸우다가 죽으니 즉 九월 五일이었다. 자손(子孫)이 정읍시(井邑市) 용호동(龍虎洞)에 초혼장(招魂葬)으로 모시니 앞산 손좌(巽坐)이다. 배(配)는 의인(宜人) 나주나씨(羅州羅氏)요 참봉(參奉) 응기(應箕)의 따님이며 계배(系配)는 의인(宜人) 광산김씨(光山金氏) 익정(益精)의 따님이다.

아들 한 분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진종(振宗)이요 큰 딸은 오충갑(吳忠甲)에게 출가하고 작은딸은 김지영(金地英)에게 출가하였다. 진종(振宗)이 여산송씨(礪山宋氏) 진문(鎭文)의 따님과 결혼하였고 부안김씨(扶安金氏) 생원(生員) 연(鍊)의 따님을 재취(再娶)하여 아들 오형제를 낳으니 맏아들은 영엽(永燁)이요 둘째는 영욱(永煜) 통훈대부(通訓大夫)요 셋째는 영환(永煥)이요 넷째는 영형(永炯)이요 끝이 영위(永펩)이다. 영엽(永燁)이 처유(處裕)를 낳으니 무과선전관(武科宣傳官)이요 영욱(永煜)이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은 세유(世裕)로 공조참의(工曹參議)요 둘째는 태유(泰裕)이며 영환(永煥)은 필유(必裕)로 입계(入系)시켰고 영형(永炯)의 두 아들중 맏아들 필유(必裕)는 출계(出系)하고 둘째는 후유(後裕)요 영위(永펩)가 삼남을 두었으니 계유(繼裕)와 성유(聖裕)와 혜유(惠裕)다 四세손 봉문(鳳文)과 五세손 연(縯)과 六세손 경엽(景燁)과 七세손 철우(哲宇)와 석량(錫亮)은 모두 효행(孝行)으로 조정(朝廷)에 알려져 명정려(命旌閭)하니 이 모든 것이 공(公)이 끼친 모범의 덕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공(公)이 시례법(詩禮法)을 지키는 집안에서 태어나 도덕(道德)을 바탕에 둔 문하(門下)에서 배우고 소박하고 방정(方正)하니 이러므로 비록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도 향상(向上)하고 싶은 일념이 진실임이 분명하여 몸을 탕화(湯火)속으로 뛰어들고 편안함을 버리고 어려움을 택하니 백세(百世)의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위대하지 않는가. 다만 후손(後孫)들이 영체(零替)하여 아직 국가의 은전(恩典)을 못입었으니 그것이 식자(識者)들의 한(恨)이 어떻겠는가. 八세손 종순(鍾純)이 흰머리 노령(老齡)으로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 비문을 부탁하니 나는 그럴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하다 못하고 가장(家狀)을 근거하여 글을 쓴다.

- 光山 鄭義林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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