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종친회회보

밀양손씨(密陽孫氏) 족보서(族譜序) 건곤보(乾坤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종사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5-09-02 17:17 조회5,054회 댓글0건

본문

족보(族譜)는 왜 만드는가? 옛 사람들이 세대(世代)가 멀어지면 근본(根本)을 잊고 친분(親分)이 다하면 정의(情誼)가 소홀해져 선조(先祖)로부터 내려온 근본을 밝혀 자손(子孫)들의 지파(支派)가 번져도 소홀해진 사이를 족보(族譜)를 보고 그 본지파(本支派)를 연결하여 그 친목(親睦)의 정의를 돈독히 하려함인즉 족보의 의의(意義)가 얼마나 중차대(重且大)한가?

사람이 나무를 보면 모두 한 그루에서 수만(數萬)가지가 번지는 것을 보면서도 내 몸이 또한 그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모른다. 족보의 계보(系譜)와 그 파(派)를 가려보면 나무의 줄기와 가지와 같아서 족보의 파계(派系)를 구분함에 도움을 주니 이 또한 족보의 없어서는 안될 필요조건(必要條件)이다.

우리 손씨(孫氏) 초강생(初降生)의 세월이 아득하여 멀리 삼한(三韓)시대로부터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수천년 동안을 연면(連綿)하게 씨족(氏族)이 이어 내려와 가히 영장(靈長)의 세계(世系)를 전하여 옴이라. 원래 월성(月城)의 손씨(孫氏)는 휘 순(順)을 시조(始祖)로 하는데 모량(牟梁)이후의 세계(世系)는 알수가 없으며 밀성(密城)의 손씨(孫氏)는 밀성(密城)에 처음 봉(封)해진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고 다만 정당공(政堂公) 휘 빈(贇)을 중조(中祖)로 하였는데 이제 여러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을 상고하는데 힘입어 비로소 광리군(廣理君)이하 十二世의 세계(世系)를 발굴하여 정당공(政堂公) 이상의 세계(世系)를 이었으니 이는 정말 경사스러운 일이며 하늘의 도움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아! 우리나라가 동방(東方)의 한쪽에 치우쳐 있어 옛날 문명(文明)이 열리지 않아 기라(箕羅)이래로 문헌(文獻)이 고증(考證)되지 않고 천년의 보록(寶?)이 아직 명확하지 않아 무릇 모든 세보(世譜)가 완전하지 못함이라. 이제 족보를 만들지 아니하고 다시 후세에 족보를 전해주지 않으면 이 뒷사람들도 오늘날 우리와 같이 어찌 옛 일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내가 오랫동안 걱정해 오는 바라. 구보(舊譜)를 중수(重修)하고 그 사적(事蹟)을 적어 뒷날 수보(修譜)하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숭정기원 육십년 을해 오월 상한(崇禎紀元 六十年 乙亥 五月 上澣)
후손 전 삼가 씀(後孫 佺 謹序)



건곤보(乾坤譜) 란?

밀양손씨 최초의 대동보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양대 외란(外亂)을 겪으면서 선조들의 사적(事蹟)과 세계(世系)가 유실(遺失)되고 종족(宗族)의 터전이 산지사방(散地四方)하여 이산(離散)된 종족을 재통합하고 종문(宗門)의 단결을 재정립(再定立)하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진주(晋州) 오곡공(梧谷公)의 후예인 검암공(儉庵公) 휘 전(佺)과 보성(寶城)의 목사공(牧使公) 후예 야옹공(野翁公) 휘 상륭(尙隆)등이 중심이 되어 흩어진 가승(家乘)과 파보(派譜)들을 모으고 전국 각처를 맨발로 걷다시피하여 우리 손문(孫門) 최초의 대동보를 출간하게 되었으니 건곤보(乾坤譜) 즉 을해(乙亥 :숙종 21년)보이다. 이때가 서기 1695년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