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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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호공(月湖公) 기락(基洛)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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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4-06-26 11:25 조회2,7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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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호공(月湖公) 기락(基洛)의 초휘(初諱)는 기영(基榮)이고 자(字)는 도진(道振)이다.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 광리군(廣理君) 휘 긍훈(兢訓)의 四二세손이요 대사간공(大司諫公) 휘 세옹(世雍)의 十三세손이다. 아버지 휘 장우(章友)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추증되었다.
철종(哲宗) 무오(戊午)년 10월 1일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자질(資質)이 특출(特出)하여 능히 효도(孝道)하고 경장(敬長)하는 비범한 행동을 보였다.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혼정신성(昏定晨省)의 구절을 익히고 나서는 꼭 실천해야 하는 덕목(德目)으로 알고 실천하였다. 성장(成長)하면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문하(門下)에 사사(師事)하고 선생의 높은 지기(志氣)를 흠모(欽慕)하였다. 최선생께서 항일(抗日)하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유폐(幽閉)되었을 때 모든 정성을 다하였고 자결(自決)을 하시자 제자로서 예법에 따라 3년 동안을 심상(心喪)을 입었다.
고종(高宗) 경자(庚子)년에 효릉참봉(孝陵?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이어서 갑진(甲辰)년에 통정대부 비서원승(通政大夫 秘書院丞)에 제수되었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서책(書冊)에 파묻혀 고전(古典)을 읽는데 몰두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항상 함께 있으면서 서로 격려하였고 일가간에 어려움이 있으면 힘닿는데 까지 도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하였다. 고을의 선비들과 교유(交遊)하면서 고장의 발전을 위하여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만들어 실천하여 고을의 풍속을 크게 개선하였다.
공(公)께서 깨끗한 방 하나를 마련하여 선조(先祖) 광리군(廣理君)의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매달 초하루 보름을 거르지 않고 참배(參拜)하며 자손들에게 “선조(先祖) 광리군(廣理君)께서는 충성심과 의리심(義理心)으로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추앙(推仰)하고 있다. 하물며 후손된 자들로 더 엄숙하게 공경하고 그 정신과 공업(功業)을 계승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고 하였다.
공(公)은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경치가 좋은 곳에 정자(亭子)를 짓고 책을 읽으며 벗들과 시문(詩文)으로 화답(和答)하며 지냈고, 특히 서해(西海)에 은둔해 있는 간재(艮齋) 전우(田愚)선생을 찾아 배를 타고 방문하여 교유(交遊)하였는데 전선생께서는 공(公)을 시대(時代)의 현사(賢士)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전선생은 특히 ‘예의(禮義)’ 두글자를 강조하며 이 시대의 퇴폐(頹廢)를 한탄하였다. 무오(戊午)년의 국상(國喪) 때에는 통곡하다가 혼절(昏絶)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고 상복(喪服)을 입고 날마다 월산(月山)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통곡을 하니 고을 사람들이 그곳을 망곡대(望哭臺)라고 불렀다. 울분을 참지 못하여 그것이 병이 되어 몇 년을 앓다가 임술(壬戌)년 5월 25일에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을 선비들이 “어진 사람이 돌아가셨다”하고 안타까워 하며 경모사(景慕祠)를 짓고 공(公)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봄 가을에 제사를 모셨으니 공(公)의 덕화(德化)가 얼마나 주위에 감화를 주었는지 짐작이 간다. 유고(遺稿) 몇 권이 전해져 오고 있다.
공(公)의 배위(配位)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이고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재일(載一), 재중(載仲), 재삼(載三), 재담(載淡), 재록(載錄), 재섭(載燮)이다.
공(公)은 기우(器宇)가 준수(俊秀)하고 단정하였으며 뜻이 높고 강직하면서도 온후하고 성품이 명랑하면서도 돈후(敦厚)하였다, 신의(信義)가 독실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대인군자(大人君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효성(孝誠)과 우애(友愛)와 충신(忠信)은 하늘로부터 타고났으며 좋은 스승을 만나 학문(學問)과 지기(志氣)를 갈고 닦아 대성(大成)하고 헛된 영예(榮譽)와 이익(利益)의 추구(追求)를 극히 싫어하고 올바른 생활을 몸소 실천하고 척사현정(斥邪顯正)을 주창(主唱)하며 높은 충의지심(忠義之心)을 간직하였으니 영원히 후손들의 사표(師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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