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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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孝子) 손공(孫公) 정려기(旌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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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4-06-26 11:20 조회2,6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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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求禮)의 북문(北門) 관도(官道)를 나오면 문주(門柱)가 서있는데 사람들이 손효자(孫孝子)의 정려(旌閭)라고 말한다. 내가 어릴적에 서당(書堂)으로 공부하러 다닐 때 이 정려(旌閭)의 밑을 많이 지나다녔다. 근세의 사람들의 도덕성(道德性)은 날로 쇠(衰)하여 가는데 효열(孝烈)의 정려(旌閭)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울 정도로 드물게 있다. 손효자(孫孝子)의 정려도 또한 그러하리라. 나는 성심(誠心)이 부족하여 많이 듣지 못하였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九년에 조정(朝廷)에서 신하(臣下)들을 각 지방으로 보내어 효자(孝子) 손순흥(孫順興)등 열 사람을 발굴(發掘)하여 八백섬의 쌀과 은잔(銀盞)과 비단을 등급별(等級別)로 하사(下賜)하고 정려(旌閭)를 세울 것을 명(命)하고 손효자(孫孝子)의 효성(孝誠)을 칭찬하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화상(畵像)을 모셔놓고 조석(朝夕)으로 생시(生時)와 똑같이 모시니 이는 고금(古今)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 하였다.
나는 이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여 그 정려(旌閭)를 찾아서 돌아보았는데 그 자리를 떠나기가 싫었다. 아! 성종조(成宗朝)가 수백년이 지나 여각(閭閣)이 오래 되었다. 내가 개성(開城)을 지날 때 이른 곳은 위봉루(威鳳樓)와 산우정(山톱亭)인데 잡초 넝쿨이 무성하게 우거져서 왕후장상(王侯將相)들의 흥성(興盛)함을 찾을 길이 없고 대근(臺覲)도 물어서 무엇하겠는가? 이 효자각(孝子閣)은 우리나라에서 으뜸 가는 옛 경물(景物)로서 병화(兵火)와 비바람을 견디고 두 번씩이나 싸움터가 되었으나 무너지지 않았었다. 길손들의 전해 오는 말이 이와 같으니 효도(孝道)란 인륜(人倫)에 있어서 위로는 공덕(功德)이 하늘에 통하고 신명(神明)을 움직이니 그것은 오래 가고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 몰래 행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진실로 행적(行蹟)이 썩지 않은 소이(所以)인 것이다. 왕공(王公)도 부러워하고 필부(匹夫)도 탐내는 바라 할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齊)나라의 경공(景公)은 말(馬)이 천마리나 되는 부자라도 죽으니 백성들이 칭송(稱頌)하는 사람이 없는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어도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으니 허울좋은 것은 오래도록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 나라를 통털어 효자(孝子)가 겨우 열사람 밖에 없으니.... 요지음 공경대작(公卿大爵)들의 수레(車)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비록 적은 고을이라 할지라도 삼강(三綱)을 적은 책들이 차안에 가득하니 그 진위(眞僞)를 가릴 수가 없다. 손순흥(孫順興)은 효자(孝子)중에서도 으뜸인데 다시 생각하면 화상(畵像)을 봉사(奉祀)하고 三일마다 성묘(省墓)를 한다는 것은 예도(禮道)를 아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불안한 것이다.
효자(孝子)는 그것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니 세간에서 정성스럽게 그 효행(孝行)을 높이고 거짓 없이 빛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효자(孝子)는 참되게 실행(實行)하고 글로써 꾸며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거의 가까운 고을 사람들의 일이라 어찌 아득한 옛날 일이라고만 할 것인가!
그의 후손(後孫)인 충신(忠臣) 인필(仁弼)과 그의 아들 숙남(淑南)은 선조(宣祖) 정유(丁酉)년에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이 지휘하는 해전(海戰)에서 왜적(倭賊)을 격파하고 종군(從軍)중 전사하였는데 인필(仁弼)은 벼슬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올라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와 군지(郡誌)에 실렸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본군(本郡) 현감(縣監)인 이원춘(李元春)은 남원(南原)에서 전사하고 충무공(忠武公)을 모시고 간 사람은 손모(孫某)라 기록되어 있다. 대략 효자(孝子)의 후대를 말하면 충의(忠義)로써 남긴 모범(模範)이 면면(綿綿)하게 끊이지 않는 것은 더욱 존경스러운 일이다. 여각(閭閣)은 틈이 많이 생기고 흙담이 무너져서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금년 봄에 후손들이 중수(重修)를 하고 내게 기문(記文)을 의뢰하니 나는 지난날 정문(旌門)을 지날 때 못 들른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부끄럽고 생각이 깊지 못하였음으로 예절을 지키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곳에 사는 이들로부터 변천(變遷)되어 온 사실을 듣고서야 고려(高麗) 손효자(孫孝子)의 정려(旌閭)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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