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書道) 신품사현(神品四賢) 탄연국사(坦然國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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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2-08-30 10:31 조회3,237회 댓글0건본문
고려(高麗) 중기(中期) 새나라의 문화가 한창 무르익을 문종(文宗) 24년에 태어나 의종(毅宗)때까지 90세의 고령으로 고려의 왕사(王師)를 지내신 탄연(坦然)국사는 밀양손씨(密陽孫氏)로 밀양의 교위(校尉) 휘 숙(肅)의 아드님이시다. 13세에 육경(六經)의 대의를 통달하고 1085년(神宗) 2년에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번저(藩邸)에 있던 숙종(肅宗)의 초청으로 세자를 보도(輔導)하다가 1088년 궁중에서 몰래 경북산 안적사(安寂寺)로 출가하였다. 그뒤 광명사(廣明寺)의 혜조국사(慧炤國師) 정현(鼎賢)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심요(心要)를 전수받고 다시 총림(叢林)을 두루 방문하며 증득(證得)한 바를 단련하였는데 모든 학자들이 그를 경모하였다. 뒤에 늙은 어머니 때문에 멀리 떠나지 못하고 외산(外山)에 조그만 절을 구하여 봉양하였다. 1104년(숙종 9년)에 대선(大選)에 합격하여 왕명에 따라 중원(中原) 의림사(義林寺) 주지가 되었고 1106년(예종1년)에는 대사(大師), 1109년에는 중대사(重大師), 1115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1117년 선암사(禪岩寺)에 머물렀다.
1121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1123년(인종 1년)에 인종(仁宗)에게서 첨수가사(添繡袈裟)를 하사받았으며 1129년 보리연사(菩提淵寺)의 주지가 되어 법회(法會)를 개설하였다. 보리연사에는 뱀이 많아서 다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가 법회를 열고난 후로부터는 뱀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132년 대선사(大禪師)가 된 뒤부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諮問)에 응하였고 1146년에 왕사(王師)가 되었다. 1148년 단속사(斷俗寺)로 돌아가 은퇴한 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선교(禪敎)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때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黨語句)를 지어 중국 광리사의 개심(介諶)에게 보냈더니 개심은 대단한 찬탄과 함께 의발(衣鉢)을 법(法)의 증표로 보냈다. 1159년 제자들을 불러서 “내가 가는 곳은 내가 벌써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당초에 세속의 본을 떠서 소기(小忌) 대기(大忌)를 지내지 말고 사십구재(四十九齋) 백일재 명재(明齋)도 지내지 말고 오직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유훈을 남긴 뒤 입적(入寂)하였다. 특별히 서예(書藝)에 뛰어나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따랐는데 서도신품사현(書道神品四賢)이라 부르는 김생(金生) 최우(崔瑀) 유신(柳伸)과 함께 당대의 명필(名筆)이었다. 춘천 청평사(淸平寺) 문수원(文殊院)의 중수비와 예천(醴泉)의 복룡사(伏龍寺)비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 중수비등을 썼으며 경북 청도군 운문사(雲門寺)의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는 호부상서(戶部尙書) 문강공(文康公) 윤언이(尹彦?)가 찬한 것을 탄연국사가 쓰신 것으로 보물 제31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귀부(龜趺)와 이수는 상실(喪失)되었으나 세조각이 된 비신은 복원되어 청정도량인 운문사 대웅전 옆에 서있다. 서거정(徐居正)이 말하기를 동방(東邦)의 필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극일(姚克一), 탄연(坦然)이 다음 간다고 높이 평가했다.
국사께서 입적하신 후 나라에서 국사(國師)로 추증되고 시호를 대감(大鑑)이라 하였다.
1121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1123년(인종 1년)에 인종(仁宗)에게서 첨수가사(添繡袈裟)를 하사받았으며 1129년 보리연사(菩提淵寺)의 주지가 되어 법회(法會)를 개설하였다. 보리연사에는 뱀이 많아서 다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가 법회를 열고난 후로부터는 뱀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132년 대선사(大禪師)가 된 뒤부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諮問)에 응하였고 1146년에 왕사(王師)가 되었다. 1148년 단속사(斷俗寺)로 돌아가 은퇴한 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선교(禪敎)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때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黨語句)를 지어 중국 광리사의 개심(介諶)에게 보냈더니 개심은 대단한 찬탄과 함께 의발(衣鉢)을 법(法)의 증표로 보냈다. 1159년 제자들을 불러서 “내가 가는 곳은 내가 벌써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당초에 세속의 본을 떠서 소기(小忌) 대기(大忌)를 지내지 말고 사십구재(四十九齋) 백일재 명재(明齋)도 지내지 말고 오직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유훈을 남긴 뒤 입적(入寂)하였다. 특별히 서예(書藝)에 뛰어나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따랐는데 서도신품사현(書道神品四賢)이라 부르는 김생(金生) 최우(崔瑀) 유신(柳伸)과 함께 당대의 명필(名筆)이었다. 춘천 청평사(淸平寺) 문수원(文殊院)의 중수비와 예천(醴泉)의 복룡사(伏龍寺)비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 중수비등을 썼으며 경북 청도군 운문사(雲門寺)의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는 호부상서(戶部尙書) 문강공(文康公) 윤언이(尹彦?)가 찬한 것을 탄연국사가 쓰신 것으로 보물 제31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귀부(龜趺)와 이수는 상실(喪失)되었으나 세조각이 된 비신은 복원되어 청정도량인 운문사 대웅전 옆에 서있다. 서거정(徐居正)이 말하기를 동방(東邦)의 필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극일(姚克一), 탄연(坦然)이 다음 간다고 높이 평가했다.
국사께서 입적하신 후 나라에서 국사(國師)로 추증되고 시호를 대감(大鑑)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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