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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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천대효(出天大孝)의 피는 오늘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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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연순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4-01-15 11:14 조회2,4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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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사(弘孝祠)의 효부상(孝婦賞) 이 연 순(李蓮順)


섬진강 상류의 그림같은 절경속에 고요히 자리잡고 있는 마을, 화순군북면 신기리, 누대(累代)째 살아오는 이곳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에서 곱게 자란 이연순(李蓮順)씨는 1978년 한마을에서 자란 밀양손씨(密陽孫氏) 46세손인 손영석(孫永錫)에게로 출가하여 3남 1녀의 자녀(子女)를 두고 광주시(光州市) 남구(南區) 방림동(芳林洞)에서 살고 있는데 두메산골의 빈한한 가정으로 시집을 와서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살아 왔으나 10여년 전에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광주시내로 나와 맞벌이를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홀로 되신 시어미니께서 하반신 마비로 기동을 못하시게 되자 하루같이 대소변을 받아내며 늘 정결하게 목욕시켜 드리고 입맛에 맞는 음식을 최선을 다하여 마련해 드리는 등 행여 어머님께서 불편해 하실까 보아 나가던 직장도 포기하고 집안에서 부업으로 생계를 도와가며 효행(孝行)을 다해 왔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들이 없이 딸뿐인 친정 어머니께서 역시 노령으로 기동이 불가능해지자 두 어른을 한 집안에서 모신다는 것은 불가능해 한 몸으로 두 집일을 도맡아 하려니 쇠붙이로 된 사람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일을 이를 깨물며 강행하고 심지어는 허리디스크로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으나 병석에 계신 두 분을 생각하며 도저히 생각해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2000년 6월에 친정어머님은 별세하시고 눈물도 마를 틈 없이 시어머니 봉양에 몸을 맡겨야하니 산다는 것이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3남매를 대학교육을 시키자니 저희들이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것을 보면 이중삼중의 정신적 고통이 따르지만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고 가정을 끌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像)을 보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성어린 효성으로도 세월을 붙잡지는 못한 것 같았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긴 세월의 투병(鬪病)을 뒤로하고 먼길을 떠나셨습니다. 자식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멀리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참고 견뎌오던 척추디스크를 견디다 못해 수술대위에 누워야 했습니다. 극도로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이기적인 사회풍조 속에서 한 몸을 바쳐 효도하는 생활은 천년동안 우리 핏속에 흐르고 있는 출천대효(出天大孝)의 도도한 흐름이 멈추지않고 지금도 우리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음을 실감케 합니다. 더 밝은 사회, 도덕과 윤리가 되살아나는 사회를 위한 등불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단법인 홍효사(弘孝祠)란?

사단법인 홍효사(弘孝祠)는 신라국효(新羅國孝) 손순(孫順)의 효사상(孝思想)을 널리 전파하고 만인의 덕목(德目)으로 삼아 널리 교화시키고자 1985년도에 이분의 후손인 전국손씨(全國孫氏)의 종친들이 모여 발기(發起)하고 사단법인 홍효사 창립총회를 개최했으며 다음해인 1986年 2月에 법인체로 발족하에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효행(孝行)을 연구하고 교육수련시켜 퇴락한 효친경로(孝親敬老) 사상을 회복하고 사회윤리와 도덕을 새로 정비하는데 목적을 두고 사업을 전개하여 오던 중, 전국적으로 효자효부(孝子孝婦)를 발굴하여 표창하고 널리 알림으로써 효(孝)에 대한 일반국민의 인식을 전환시켜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삼고 쇠퇴해 가고 있는 윤리관을 바로잡아 고유의 미풍양속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이 운동을 전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계(學界)에서 꾸준한 연구와 학문활동으로 연구업적이 뛰어나신 분을 위하여 학술상도 시상케 되었으며 특히 학생으로서 효섬이 지극하며 공부는 잘하나 경제적으로 형편이 곤란한 학생 약간명에 대해서도 학자금 일부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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