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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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氏 氏族長 俱禮馬祖 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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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손한종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4-01-15 10:59 조회2,847회 댓글0건

본문

“俱禮馬는 孫氏 氏族長으로 文義王에 追封되신 분이다.”
宗史硏究委員 孫 漢 鍾

…지난호에 이어서

◎ 우리 손씨씨족 혈연집단을 직접 거느리고 계시던 씨족장 구례마시대는 우리 씨족부락 자체로 외적을 방비할수 있는 정병(精兵)까지 가지고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卷 第一)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第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11년 조(條)에 의하면 『왜적(倭賊)이 병선 100여척으로 해변을 침범하여 민가를 노략하자 육부(六部)의 정병이 출진하여 막았고, 또 낙랑(樂浪)의 군대가 경주금성을 침공하자 육부군사(六部軍士) 일천명을 출전시켜 추격해서 격퇴시켰다.』고 했다.
육부인 씨족마을에서 각각 소속된 군대를 출진시켜서 적군과 전투를 벌이게 하자면 응당 대수촌(大樹村)의 손씨족(孫氏族) 마을에서도 정병을 출동시켰을 것이고 그토록 위급한 막중사건에 추장(酋長)인 씨족장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적군을 추격하고 격퇴시켰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짐작이 가는 일이다.

◎ 다음으로 경주손씨대종회(慶州孫氏大宗會)에서는 1984년에 간행된 밀양손씨대동보(密陽孫氏大同譜 : 甲子譜)에 실린 구례마조에 대한 소개문을 곡해하고 “구례마가 진한인(辰韓人)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여기에 왜 마한(馬韓)18년인가? 아무렇게나 꿰 맞추면 된다고 느낀모양이라”고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한고조(漢高祖)3년 정유(丁酉) BC 224년에 고조선이 7862년간(桓國朝鮮 3301년. 倍達朝鮮1565년.檀君朝鮮 2096년 합계 7862년)의 사직의 문을 닫고 멸망하자 우리의 씨족장 구례마조께서는 다른 다섯족장들과 함께 씨족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 영토였던 중화 만주땅을 떠나서 한반도 동남단의 동해변으로 대이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보다 29년후 북조선의 평양에 있던 후조선에서는 BC 195년 한고조 12년 병오 무강왕(武康王:準王) 원년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강왕 준에게 투항하여 동래하니 위만을 우대하여 박사를 배하고 서계를 방비하게 하였더니 위만이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후조선(後朝鮮)을 공탈하고 한혜제(漢惠帝)원년 BC 194년 후조선 무강왕 준 2년에 왕검성 평양에 도읍하고 위만조선을 세우니 후조선은 망하고 무강왕준은 좌우궁인만을 데리고 황급히 남주이주(南走移住)하여 남으로 내려와 한지(韓地) 금마군(金馬郡)에 도착하여 마한을 건국하고 진왕(辰王)의 승인과 보호하에 동계(東界)의 유이민사회(流移民社會)를 통솔하고 자기의 씨성을 따서 마한왕(馬韓王)이라 자호자칭하고 군림했다는 것이다.

◎ 이병도 박사에 의하면 그당시 진한은 분명히 자립하지 못한 유이민사회로 마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하였고 삼국사기 권제일(卷第一) 신라본기제일(新羅本紀第一) 시조조(始祖條)에 『三十八年 春二月 遺瓠公聘於馬韓 馬韓王 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라. 즉 “38년 2월에 공을 마한에 보내어 수방하매 마한왕이 꾸짖어 가로되 진.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직공을 보내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이같을수가 있겠느냐”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진한은 분명히 마한의 지배를 받았던 속국이고 신라시조 혁거세왕 38년 BC 20년보다 157년전인 BC 177년 한문제(漢文帝) 3년 우리 씨족장 구례마조께서 자손의 씨족집단을 이끌고 고조선 땅으로부터 한반도 동남단의 진한땅으로 대이동 유입하여 마한의 동계(東界)땅을 마한왕으로부터 생활거주영토로 할당 받아서 진한의 경주이산에 하강하여 무산대수촌을 건설할 당시는 마한의 지배 밑에 있었고 우리씨족들은 연호가 없고 년도를 기준잡을데가 없었으므로 당연히 소속된 대국인 마한왕 18년에 경주이산에 내려왔다고 기록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한 준왕 일운무강왕이 후조선의 마지막 임금 무강왕으로서 한고조 12년에 위만에게 서계를 방비토록 하였다가 배신을 당하여 급습을 받고 남주하여 금마군까지 와서 한왕(韓王)이라 자칭자립하고 한혜제(漢惠帝)원년 BC194년 정미에 마한을 건국하여 마한시조왕 강왕준(康王準)으로 등극하여 5년간 재위한후 한혜제6년 BC189년에 아들에게 양위하여 안왕(安王)이 제2대 마한왕으로 올라서 32년간 재임하였기 마한왕 18년은 마한안왕이고 BC177년 갑자 한문제(漢文帝)3년으로 우리손씨 씨족장 구례마조께서 경주이산에 하강하신 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팔사(1984년)갑자보에 구례마조께서 한문제3년 갑자3월갑진 마한왕 18년 강우경주이산(降于慶州伊山)이라고 족보에 기록한 것은 정확한 입증자료로 제시된 것이라 하겠다.

결언(結言)
끝으로 구례마의 의미에 대하여 정중환교수는 “신라사논선집” 「신라의 국가형성」 「신라의 6촌6부와 사로6촌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대수촌장인 구례마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바이다. 구례(俱(仇)禮)와 마(馬)의 합어로 구례는 지금 일본어로 돼서 있는 모(暮)의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구례는 저물다의 뜻으로 저물은 해가지고 어둠이 다가오는 뜻에서 「서(西)」「서방(西方)」의 뜻이 있다.
※日本書紀繼體42年條참조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에 보이는 ‘윤례모라(允禮牟羅)’를 필자 정중환은 지금의 영산지방(靈山地方)으로 보는데 여지승람 영산조에 보면 영산을 서화현(西火縣) 또는 상약현(尙藥縣)이라 하였는데 상약현이라고한 것은 영산에 약수가 있기 때문에 약수에 연산이란 지명이라고 보겠으나 서화현이라는 것은 ‘윤례모라’라는 말뜻이라고 본다. ‘마(馬)’란 「마을」의 줄인말로 일본어의 모라(무라)와 같이 본디 마을을 몰, 말, 모라(毛羅), 모량(毛良)과 같은 말이라고 본다. 그러나 구례마는 모촌서부(暮村西部)라는 뜻으로 ‘점량부(漸梁部)’라고한 ‘점량’은 ‘저문도리’ ‘저문 들’의 뜻으로 사용된 말이라고 하겠으며 ‘모량리(毛良里)’라고한 것은 구례(俱禮)는 생략되고 ‘마(馬)’라는 말만이 이명(里名)으로된 것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와 같이 구례마에 대하여서는 모촌서부라 하고 「저문 들」이라고 해석한 것은 씨족장 명칭으로는 무의미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구례마조의 어원에 대하여 고대 손씨선조민 탁족에 대한 고찰에서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하면 구례마는 아득한 옛날 후기구석기시대였던 중화대륙의 고조선시대부터 우리 씨족집단을 이끌던 「굴(窟)에 마마(??) 」부른 씨족장의 칭호 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고조선시대부터 불러오던 우리 씨족장의 칭호 구례마는 삼한시대 진한에서 혈연집단의 손씨족부락인 무산대수촌까지 내려와서 씨족장칭호로 통용되다가 신라유리왕 9년 AD32년을 전후하여 씨족사회가 붕괴되어 부족사회로 발전하여 행정구역으로 바뀌면서부터 씨족장의 칭호로 구례마께서는 역사속에 묻히고만 것이다.
2000년전 구례마시대는 우리 씨족집단 자체내에서 정병을 확보하고 우리들의 무산대수촌을 외적으로부터 지켰으며 우리 선조님들은 안에서는 농상(農桑)에 힘쓰고 밖에서는 농사를 지어서 생산을 마음껏하여 들판에 노적가리를 가득 쌓아 놓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밤에 문을 닫지 않고 근심없이 평화롭게 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시조조에는 백성에게 농상을 권려하여 토지의 생산을 마음껏 하도록 하고 이 지방사람들이 밤에 문을 닫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가득하였다는 글이 있고 남해차차웅조에는 6부정병이 왜적의 노략을 막고 6부군사 1천이 낙랑군사를 추격하였다는 기록을 보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구례마조께서는 고조선으로부터 삼한의 진한땅 경주이산에 하강하신지 693년이고 서라벌을 건국하신지 573년이만이고 손씨 사성 받은지 484년후인 AD516년 신라 법흥왕3년 병신에 충렬군(忠烈君)의 시호를 하사 받으시고 우리 씨족마을인 무산대수촌을 이룩한지 833년후이며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옹립하고 건국한지 713년이고 손씨로 하사 받은지 624년만인 AD656년 신라 태종무열왕3년 병진에 문의왕(文義王)으로 추봉되셨다.
그리고 최근 1971년 10월에 박정희대통령이 신라개국공신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경주시탑정동 라정에 입덕묘를 세우고 신라건국공신 육촌장들의 위패를 모실 때 우리 할아버지 구례마조를 제3위차로 모시고 매년 음력 8월23일을 기하여 우리 자손들이 모인 가운데 경주시장이 향사를 모시고 있다. <끝>

필자: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291-28 孫漢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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