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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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선생(鄒川先生) 손영제(孫英濟) 묘갈명(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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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10-02 10:17 조회2,8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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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是 瓚


추천(鄒川) 손선생(孫先生)이 돌아가신지 2백여년이다. 9대손 승구(承九)씨가 문중의 뜻으로 와서 시찬(是瓚)에게 말하기를 선조의 사행(事行)은 마땅히 명법(銘法)에 응해야 하거늘 세상의 옛자취가 임진왜란때 다 없어지고 우리집도 삼세가 고단(孤單)하고 조졸(早卒)하였음은 그대가 아는 바다. 평일에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을 지금 무엇으로 상세히 하겠는가? 오직 그대는 동향(桐鄕)에서 생장하여 나의 선조의 일을 아는 것이 남보다 다를 것이므로 지금 그대에게 부탁하노라.
사적(事蹟)은 위대하고 나의 문장은 옹졸하니 난장이가 천균(千鈞)을 드는 것 같아 돌아보건대 어찌 감히 할 수 있으리. 오직 공이 우리 고을에 오신것은 퇴도(退陶)선생 세대에 이르렀네. 부임하자 암서헌(巖棲軒)에 가 퇴계(退溪) 선생을 뵈옵고 그 가르침을 새기고 물러나 문하에 여러 현인들과 선(善)으로 전하니 월천 조목(月川 趙穆) 일휴금응협(日休琴應夾) 우리집 후조당(後彫堂)같은 여러분들은 누가 도의로써 간절히 말하지 않으리요마는 선조 설월당(雪月堂)은 더욱 간절하였다. 이미 사계(事契)로써 책임지우니 비록 문장이 아니나 감히 사양할 수 있으리요. 드디어 그 세계(世系), 이력(履歷), 생졸(生卒), 덕업(德業), 자손(子孫)을 차례로 적어 무덤에 게시하게 하노라.
그 세계(世系)는 신라시대 종(鐘)을 얻어 효도로써 이름난 분이 있으니 순(順)이라 한다. 사적이 삼강행실에 실려있고 고려조에는 남정(南征)한 공훈으로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진 분이 있으니 긍훈(兢訓)이라 이르고 손씨가 밀양을 본관으로 삼은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뒤 대대로 드러난 분들이 있었고 증조부 신복(信復)에 이르러 비로소 무반(武班)에 보직되었다. 조부 세번(世蕃)은 벼슬을 하지 않았고 아버지 응(凝)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참열하였다. 어머니 조씨(趙氏)는 함안인(咸安人)인데 참판(參判) 효동(孝同)이 그의 조부요 아버지는 처사(處士) 광원(光遠)이다.
선생은 명종(明宗) 17년(辛酉) 대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내직(內職)으로 춘하이관(春夏二官)의 원외랑(員外郞), 낭중(郎中), 상대(霜臺), 시어사(侍御使)를 지냈고 외직(外職)으로 예안현감(禮安縣監)과 울산부사(蔚山府使)를 지냈다. 혹 중간에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지만 증거가 없다. 그 생졸(生卒)을 말하면 생년(生年)은 듣지 못했고 1588년(戊子)에 졸(卒)했음은 벗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의 문집중에서 알았다. 밀양부 동쪽 추화산(推火山) 해좌원(亥坐原)에 잠들어 계신다.
선생의 덕업을 말하면 젊어서 학문에 힘쓰고 과거공부에 전념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고을에서 교수(敎授)하니 집밖에 신발이 가득 찼고 예안(禮安)에 있을 때 현(縣)의 학제(學制)가 미비된 것이 많아 학생이 상고(詳考)하여 법식(法式)으로 삼을 것이 없어 드디어 퇴계(退溪) 선생께 자문하고 동지들과 의논하여 학령(學令) 수십조를 지어서 권장하고 이끌었다. 지금까지 우리고을에서 문화(文化)를 말하는 이는 반드시 공(公)을 제일로 일컫는다. 퇴계선생께서 돌아가시자 방백(方伯)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에게 청하고 녹봉을 털어 도산사(陶山祠)를 세웠다. 임기가 되어 일년을 더 유임하고 갑술(甲戌)년 가을에 비로소 돌아갔다. 설월(雪月) 김부륜(金富倫)공의 “칼은 언자유(言子游)의 방에서 쓰고(刀用言游室) 거문고는 복자천(宓子賤)의 집에서 타네(琴鳴宓賤室)”와 “청렴한 인격은 뇌물을 받지 않았다(淸風不受四知金)”의 싯귀가 있으니 공의 다스림이 도를 배운데서 나왔음을 알겠다. 다음해 여름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사액(賜額)을 맞이함에 있어 또 400리를 북행(北行)하여 여러 제자의 열(列)에 참가했으니 그의 사문(斯文)에 독실했음이 이와 같았다. 대체로 공이 문하에 오른것이 비록 늦었으나 이미 자질이 아름답고 행실(行實)을 닦았으며 학문이 쌓여 졌었다. 큰 스승으로부터 노비(爐붑)의 감화와 어진 벗들의 여택(麗澤)의 도움이 있어 마땅히 그 단칠(丹漆)을 쉽게 받을 수 있었고 봉마(蓬麻)가 스스로 곧게 자랄 수 있었다. 또 만년에 오연(鼇淵)의 산수에 집을 지어 경전(經傳)을 베개 삼아 지내다 일생을 마치니 그 이룬 바를 후생(後生)이 헤아릴수 없으나 지금 공(公)이 고을에 베푼바와 나의 선조(先祖)의 시에 공문(孔門)의 두 현인(賢人)을 인용한 것과 울주지(蔚州誌)에 “학교를 돈수(敦修)하고 정치가 일세에 으뜸이었다”는 말을 참고하여 본다면 공의 빛나는 덕을 이룬 것을 또한 추측할 수 있다.
그 자손을 말하면 공은 달성서씨(達城徐氏) 현감(縣監) 시중(時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기륜(起倫), 기문(起門), 기업(起業), 기후(起後), 기명(起命)이고 전시헌(全時憲)과 이여극(李汝)은 사위이다. 임진왜란때 서숙인(徐淑人)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는데 적졸(賊卒)이 핍박하여 기륜(起倫)이 몸으로 감싸 어머니를 구하고 자신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넷째 며느님은 얼굴을 벗기고 언덕에 투신하였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모두 정문(旌門)의 명이 내려졌다. 기문(起門)은 일찍 죽어 후사가 없고 기륜(起倫)은 1남이 있으니 첨(瞻) 이고, 기업(起業)은 3남이 있으니 계지(桂枝), 각(覺), 람(覽)이다. 기후(起後)는 1남이 있으니 분(昐)이요 선교랑(宣敎郞)이다. 전시헌(全時憲)의 아들 유익(有翼)은 생원(生員), 유경(有慶), 유장(有章)은 참봉(參奉)이요 이여극(李汝)의 아들은 정준(廷俊)이다. 첨(瞻)이 또 후사가 없고 분(昐)은 2남이 있으니 창조(昌祖), 윤조(胤祖)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한 이로 현손(玄孫) 석좌(碩佐)는 진사(進士)요 호는 성은(星隱)이고 석주(碩柱)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이다. 5대손 만중(萬重)은 문과(文科)로 찰방(察訪)이었고 6대손 효증(孝曾)은 진사(進士)로 첨지(僉知) 중추부사(中樞府事)였고 7대손 극복(克福)은 무과(武科)로 부사(府使)였다. 공의 휘는 영제(英濟)요 자(字)는 덕유(德裕)다. 추천(鄒川)의 호(號)는 후조당으로 김부필(金富弼)의 문고(文稿)에서 나왔다. 추천(鄒川)은 대개 공(公)의 살던 곳이기 때문에 자호(自號)하였다. 명(銘)에 이른다.
오직 학문이 넓은 것은 바르게 스승을 모셨던 탓이요, 덕이 진취(進就)된 것은 벗들의 도움탓이다. 효와 열(烈)이 나란하였음은 가르침이 이루어졌음이요 선생의 공로는 후인의 모범이 되었도다.
(인용 : 밀성손씨화수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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