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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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氏 氏族長 俱禮馬祖 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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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손한종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10-02 10:16 조회3,733회 댓글0건

본문

俱禮馬는 실재인물의 이름이 아닌 “손씨 씨족장의 칭호”이다. 宗史硏究委員 孫 漢 鍾



서언(序言)

우리 손씨 자손 중에는 시조신(始祖神)이신 구례마조(俱禮馬祖)를 잘 알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몰지각한 족친(族親) 일부에서 구례마조(俱禮馬祖)의 체면을 훼손하는 사례가 있음을 볼때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천학비재(淺學菲才)한 소생은 본 졸고(拙稿)를 발표하여 종친 제위(諸位)에게 공람(共覽)하는 바이오니 읽어보신후 모순을 발견하셨으면 필자의 주소지로 정확한 고증을 첨부하여 서면으로 지적하여 주시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종사연구에 참고하고 시정하겠습니다.

본론(本論)

구례마(俱禮馬)는 일휘(一諱) 구례마(仇禮馬)라고 쓰고 字를 천상(天祥) 또는 경운(景雲)이라고 부르며, 거금(去今) 2180년전 고조선 유민으로 우리들 씨족집단을 이끌고 한반도 동남단으로 대이동 하여 삼한의 진한땅으로 내려오신 손씨 씨족부락인 무산(茂山) 대수촌장(大樹村長)이시며 진한 사로 육부대인의 한분으로 우리 손씨의 씨족장이 되시고, 원조 할아버지가 되시며 신라건국원훈이시고 신라건국좌명 일등공신 재태사(宰太師)이시며, 국왕으로부터 성을 하사 받으신 손씨 득성시조 이신데 후에 충열군(忠烈君)으로 시호(諡號)를 받으시고 문의왕(文義王)으로 추봉되신 우리 손씨들의 시조신이시며 수호신 이시다.

- 구례마조(俱禮馬祖)와 손씨초강사적(孫氏初降事蹟)에 대(對)하여 -

삼국사기 권 제일 신라본기 제일 시조조 에는 「先是 朝鮮(古朝鮮) 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四曰 茂山大樹村」이라 「일찌기 古朝鮮 遺民들이 이곳에 와서 山谷間에 흩어져서 여섯촌락을 이루었다.…그 네번째가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이라고 하였고,
또 삼국유사 권 제일 기이 제일 신라시조조에는 「辰韓之地 古有六村」이라 하고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 俱(仇)禮馬 初降于伊山(皆比山) 是爲 漸梁(?)部 又牟梁部孫氏祖 今云 長福部 朴谷村等西村屬焉」라 하여 「辰韓에는 옛날에 六村이 있었다」하고 「三은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이니 촌장은 구례마라하여 처음 이산(伊山)에 내려와 이가 점량부(漸梁部) 일운(一云)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 하여 박곡촌(朴谷村)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하였으며,
우리 손씨집안의 선조님들도 밀양손씨 족보에 손씨초강사적(孫氏初降事蹟)을 쓰면서 삼한유사와 동국사략 및 동국통감을 인용하여 고증하기를
三韓遺事曰 「辰韓之地 古有六村…三曰 茂山大樹村長曰 俱禮馬 初降于伊山 是爲 牟梁部 孫氏祖也」라 하였으며,
東國史略曰 「朝鮮遺民居東海濱 分爲六村 是爲辰韓六部 六部會閼川(慶州北川)岸上 議曰 我輩無君主民族縱 ?求有德者爲之主 於是高墟村長 蘇伐公等 尊立赫居世 爲君都辰韓國(漢宣帝五鳳元年甲子歲)이라 하였으며
東國通鑑曰 「新羅儒理王九年(漢光武建武八年壬辰也)改六部 名仍賜六姓以…大樹部爲牟梁姓孫」이라고 한것은 俱禮馬(구례마)할아버지가 우리 손씨의 원조이심을 명확히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할 것이다.
구례마조 께서는 고조선의 유민으로 BC 238년 단군조선 47세(世) 고열가대왕(高列加大王) 58년 계해(癸亥)에 고조선이 멸망하자 우리 손씨족 집단을 이끌고 한반도 동남단으로 대이동하여 BC 177년 한(漢) 문제(文帝) 3년 마한(馬韓 : 安王) 18年 甲子 춘 3月에 진한의 구사경주(仇史慶州) 이산(伊山:계비산 또는 구미산 이라고도 한다)에 하강하여 무산 대수촌이라는 손씨부락을 건립하고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밀양손씨 대동보(1984년도 甲子譜)에서 원조 손구례마조에 대하여 「字天祥 漢文帝三年甲子三月甲辰 馬韓王十八年降于慶州伊山 羅祖建國佐命爲牟梁部大人爲毛良驛」이라
「자(字)는 천상(天祥)이라 하고 한문제 3년 갑자(甲子) 3월 갑진(甲辰) 마한왕18년에 경주 이산(伊山)에 하강하셨다」하고 「신라조의 건국좌명을 하고 모량역(毛良驛) 모량부대인(牟梁部大人)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 글에 대하여 경주손씨대종회(사무국장 손명익)는 「경주손씨보(慶州孫氏譜)를 해설하는 서책에 밀양손씨족보에 대한 소고(小考)(所謂八四甲子譜. 1984 AD)라 하여
「1. 밀양손씨 갑자 대동보에 의하면 휘 구례마에서 휘순(諱順)까지 31세로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한마디로 조작이다.
2. 구례마조의 탄생이 한문제 3년 갑자(甲子)라고 기록해 놓았다. 한문제 3년 갑자는 BC 177년 이다. 신라건국 화백회의가 오봉갑자(五鳳甲子. BC 57)이다. 이로 계산하면 120년 전이다.
3. 구례마조께서 화백회의에 참석하실 때 120세란 말인가, 참으로 부끄러운 글귀다」하고 감정섞인 어조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경주손씨대종회에서 「밀양손씨 갑자대동보에 휘구례마에서 휘순까지 31세(世) 로 만들어 놓았다. 한미디로 조작이다」고 한 것은 84갑자보(甲子譜) 권일 39혈(頁) 첫머리에 붙인 보사소원록(譜史溯遠錄)을 보고 조작이라고 단정한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동보(仝譜)에 「오(吾) 손씨는 휘구례마의 후손임은 사실이나 일련계세 하기에는 아직 문헌이 소징(少徵)하여 휘구례마 이하 휘순 이상은 손씨소원록(孫氏溯遠錄)으로 붙이고 휘순(諱順)으로 기세(起世)하여 일련계세(一連系世)하오니 후일박고(後日博考)를 기대한다」고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일박고 하였다는 논증도 제시함이 없이 무조건 ‘조작이다’고 하고 휘구례마조를 부인하는 것은 실로 양식있는 족친의 도리라고 볼수 없다. 마치 크나큰 흉이라도 잡은 듯이 서책으로 폭로하였으니 손씨후예들은 물론이거니와 구례마조의 체면이 대외적으로 어떻게 되겠느냐 반성할 필요가 있다하겠다.
거듭 말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손씨씨족의 원조이신 구례마 할아버지에 대하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및 삼한유사와 동국사략과 동국통감에 전하는 역사자료로 명증 된바 있다.
구례마조 께서는 한문제(漢文帝) 3년 BC 177년 갑자(甲子) 춘 3월에 경주 이산(伊山)에 정착하신지 120년후이며 한선제(漢宣帝) 지절원년(地節元年) BC 69년 임자(壬子)에 알천(閼川) 안상(岸上)에서 화백회의를 개최하여 군주를 옹립하고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한지 13년만인 한선제(漢宣帝) 오봉원년(五鳳元年) BC 57년 갑자(甲子)에 육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서라벌을 건국하시고, 한선제(漢宣帝) 오봉(五鳳) 3년 BC 55년 병인(丙寅)에 서라벌 개국좌명일등공신 재태사(宰太師)가 되셨고, 한문제(漢文帝) 3년 BC 177년 갑자(甲子)에 경주 이산(伊山)에 정착한지 209년후인 신라3대 유리이사금(儒理尼斯今) 9년 AD 32년 봄에 혈연씨족부락인 육촌마을을 부족사회 행정구역인 육부로 고칠 때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을 점양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로 개칭하고 손씨로 사성받아 손씨의 시원(始原)을 열어서 손씨득성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또 경주손씨대종회에서는 「구례마조께서 화백회의에 참석하실 때 120세라는 말인가? 참으로 부끄러운 글귀다」하고 구례마조의 연령에 의문을 가지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거짓말이라 보고 부끄러운 글귀라고 하였다. 이것은 구례마조에 대한 인식의 견해 차이에서 오는 오해라고 보여진다.
구례마조께서 한문제(漢文帝) 3년 BC 177년에 이산(伊山)에 내려오시고 신라유리왕(儒理王) 9년 AD 32년에 손씨로 사성을 받으셨으니 사성받을 때 연령이 209세가 된다. 구례마조를 실존인물로 보았을 때는 연령이 209세가 되므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연령이므로 거짓말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구례마는 실재 인명이 아니고 고조선시대부터 불러왔던 우리 씨족장의 고유칭호이다. 졸고(拙稿) 「고대 선조민 탁족(?族)에 대한 고찰에서 밝힌바와 같다.
고조선시대 조선이 국호이고 단군(檀君)이 왕의 칭호를 말하는것과 같다. 단군조선때 단군칭호를 가지신 임금은 1세부터 47세까지 47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BC 2333년부터 BC 238년까지 무려 2096년간 존립했다. 단군이 2096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1세 단군(檀君)은 왕검(王儉)이시고 재위93년 이었으며, 2세 단군은 부루(扶婁)로 재위 58년이었고, 3세 단군은 가륵(嘉勒)으로 재위 49년이며 마지막 47세 단군은 고열가(古列加)로 재위 58년인 것은 단군조선사에 다 나와있는 사실이다. 고조선에서 임금을 단군이라 칭호하는 것과 같이 원시씨족사회시대에 우리 손씨의 씨족장 칭호를 구례마라 불렀고 구례마라는 칭호는 고조선시대부터 진한(辰韓) 사로국(斯盧國) 유리왕(儒理王) 이후 부족사회로 체제가 개혁되어 씨족사회가 붕괴될 때까지 사용되었던 우리 씨족장의 칭호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아득한 옛날의 고조선시대는 고사하고라도 삼한시대에 와서 우리씨족이 진한땅 경주 이산(伊山)에 내려와 무산 대수촌을 이루고 살았던 BC 177년부터 손씨로 사성받은 AD32년 까지만 계산해도 209년동안 손씨씨족장으로 구례마의 칭호가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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