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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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역사를 위하여-동학혁명의 영웅 손화중 선생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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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손정주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06-10 11:22 조회2,8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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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晶柱

1. 조선(朝鮮)조 사회의 잘못된 지배논리

조선(朝鮮)조 봉건체제(封建體制)의 중심사상(中心思想)인 유학(儒學)의 중심 개념은 인간의 능력은 선천적으로 차등(差等)이 있어 후천적으로 신분적(身分的) 차별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고정시키고 양반(兩班) 관료집단만의 정치지배(政治支配)를 보장하고 사회의 기층(基層)인 농공상(農工商)은 당연히 피지배층(被支配層)이라는 차별적 신분질서(身分秩序)를 유지강화시켜 오면서 경제적(經濟的)으로는 봉건지배층의 논리(論理)를 당연한 것으로 고착시켜 왔던 것이다.
특히 조선왕조 말엽의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收奪)은 극에 달하였던 바 농토(農土)가 많고 토지가 비옥한 삼남지방(全羅忠淸慶尙)에서는 봉건적 수탈이 특히 가혹하였으며 지방 봉건 아전족(衙前族)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는 한층 심하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개국(開國)을 선포한 후 일본(日本)으로의 쌀의 수출은 계속 증가하면서 쌀값의 앙등은 한층 심해졌는데 빈궁한 농민들은 높은 쌀값에 득(得)을 보기보다는 수확전에 부당한 쌀 값으로 입도선매(立稻先賣)를 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한층 어려워졌던 것이다.

2. 갑오(甲午) 동학혁명(東學革命)의 발단

고부군수(古阜郡守)였던 조병갑(趙秉甲)은 조씨(趙氏)와 기생(妓生) 사이에서 태어난 자인데 조병갑이 모친상(母親喪)을 당했을 때 그에게 아부하는 이속(吏屬)들이 부의금(賻儀金) 이천냥을 분배하여 고부향교(古阜鄕校)의 장의(掌儀) 김성천(金成天)과 전장의 전승록(全承祿 : 全琫準의 아버지)에게 수금을 의뢰하였던 바 김성천은 “조병갑은 본군 재직중에 선정(善政)을 한 사실이 없었을 뿐더러 기생(妓生)의 죽음에 무슨 부의냐”고 거부하였던 바 조병갑은 모친의 사망으로 퇴임(退任)하였었으나 고부군은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부유하여 재물을 착취하는데 좋은 지방이라 재임운동(在任運動)을 하여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하였다.
이때 이미 김성천은 죽었고 전승록이 살아 있으니 잡아다가 곤장으로 난타하여 고문끝에 전승록은 한달만에 장독(杖毒)으로 사망하였다.
고부군에 부임한 조병갑은 계속하여 옛날에 있던 보(洑)아래 다시 보를 쌓고 수세(水稅)라는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여 드디어 농민들이 전봉준(全琫準)의 지휘아래 저항(抵抗)의 불길이 올랐던 것이다.
전봉준은 동학남접(東學南接)의 거두인 손화중(孫華仲)을 설득하여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의 선봉(先鋒)에 섰던 것이다.

3. 손화중(孫華仲) 장군의 출생

손화중장군은 1861년(辛酉) 6월 22일 정읍시과교동(井邑市科橋洞)에서 아버지 손호열(孫浩烈)과 어머니 평강채씨(平康蔡氏)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유망한 청년으로 주위의 촉망을 받고 자랐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으로 사필(史筆)에 연루되어 윤원형(尹元衡) 이기(李ヒ)들에게 모함되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유배(流配)되어 순절(殉節) 을사명신(乙巳名臣)에 오르신 대교공(待敎公) 손홍적(孫弘積)의 후예로 선조(先祖)의 정의감(正義感)을 그대로 본받은 분이다.

4.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의 발발

부폐한 봉건특권계층인 민씨(閔氏)일족과 그에 빌붙은 양반 관료집단(官僚集團)은 부폐와 불의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적대세력으로 몰고 자기네들만의 힘으로는 농민들의 저항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청국(淸國)에 원병을 청하여 청국군대가 동학토벌의 앞장을 서게 되자 조선(朝鮮)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日本)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빌미로 자국민(自國民)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앞세워 군대를 상륙시키니 이로부터 동학혁명군의 토벌에 일본군이 개입하게 되었다.
1894년(甲午) 4월 17일 전봉준은 수천명의 농민과 함께 봉기하여 “우리가 의(義)를 내세워 일어난 본뜻은 단연코 창생(蒼生)을 도탄에서 구하고 국가를 반석(盤石)위에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 탐욕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富豪)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수령(方伯守令)밑에서 굴욕을 당하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들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라는 통문을 각처에 보냈다.

5. 일군(日軍)의 참전과 혁명의 종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청국에의 원군요청으로 이땅에 온 청군과 일군의 등장을 보고 혁명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전주(全州)에서 철수하였는데 이때 화약(和約)에는 악질적인 탐관오리의 처벌, 농가부채의 면제, 외국상인들의 침략적인 상업활동 금지, 문벌타파, 신분제도의 폐지 등 폐정개혁(弊政改革)과 반침략(反侵略)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주화약후 일본의 침략의도가 분명해지자 전봉준은 1894년 10월에 2차 봉기를 하여 동학의 남접군과 북접군이 공주(公州)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혁명군의 항전은 끝을 맺고 말았다.
공주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은 동년 12월 2일 순창(淳昌)에 있는 부하(部下) 김경천(金敬天)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그의 배반으로 민병원(民兵員) 한신연(韓信延)에게 붙잡히게 되자 순간 어둠을 타 담장을 뛰어넘어 탈주하려다가 그들이 내려친 몽둥이에 맞아 발목에 부상을 입고 나주(羅州)에 붙들려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6. 손화중장군의 피포(被捕)

1894년 9월 일본군이 나주(羅州)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봉준의 공주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대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해지자 철수하여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의 이씨문중의 재실에 피신중이었는데 생사(生死)를 함께 하기로 한 전봉준, 김개남 등 혁명동지들이 관군에게 잡혔다는 말을 듣고 재실직이 이봉우에게 “나를 고발하여 후상(厚賞)을 받아라. 그동안 그대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하여 이봉우 고발로 손화중장군은 관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30일에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순절(殉節)하니 이때 향년(享年)이 35세였다.
손화중장군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내 백성을 위하여 힘을 다했는데 사형에 처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갈(大喝)하였다고 전한다.

[ 일본 시사신문(時事新聞) 1895년 4월 20일자 ]

참고문헌 : 「동학혁명사」 최현식 저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연구」 신용하
「동학과 농민봉기」 한우근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동아시아 근현대사(일본)」 삼원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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