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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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효자 문효공(文孝公) 묘비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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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06-10 11:21 조회2,8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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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熙鳳
진한(辰韓)의 6부촌장이 신라(新羅) 시조왕을 추대하였는데 대수부(大樹部)의 촌장 구례마(俱禮馬)는 그 중 한분이었다. 유리왕(儒理王)때에 이르러 손씨(孫氏)로 성을 하사(下賜)받으니 동방(東邦)의 손씨(孫氏)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헌덕왕(憲德王)때에 시호(諡號)를 문효(文孝)라 하는 휘 순(順)이 있었으니 태자사인(太子舍人) 휘 학산(鶴山)의 아드님이다.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의 따님과 결혼하였는데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를 봉양하는데 그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친(父親)이 돌아가시고 집안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린 아이가 있어 늘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는지라 공(公)은 난처하게 여겨 부인에게 이르기를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봉양할 수가 없는 법이요”하고 이에 아이를 업고 취향산(醉香山) 북쪽으로 들어가 땅을 파고 아이를 묻으려 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쨍그랭 소리가 나므로 살펴보니 그것은 석종(石鐘)이었다.
부부가 깜짝 놀라 서로 말하기를 “이 물건을 얻음은 아이의 복인 것 같으니 묻어서는 안되겠다”하고 아이를 다시 업고 종을 가지고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쳐보니 그 소리가 왕궁(王宮)에까지 들렸다.
임금이 신하를 시켜 살펴보았더니 신하가 그 사실을 알아보고 아뢰었다. 임금님이 이르기를 “옛날 중국의 곽거(郭巨)가 어버이를 위해 아이를 묻으려다가 하늘이 금솥(金釜)을 내렸다더니 오늘날 손순(孫順)이 아이를 묻으려함에 땅에서 석종(石鐘)이 나왔으니 효성(孝誠)에 감동한 하늘의 뜻이 고금(古今)에 부합하는구나”하시고 석종은 악부(樂府)에 보관하게 하고 공(公)에게 모량부(牟梁部)의 한 구역의 집을 하사(下賜)하고 해마다 쌀 50섬과 비단 두필을 주도록 하였으니 이 때가 흥덕왕(興德王) 10년(乙卯) 즉 서기 835년이었다.
이 사실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사(高麗史)의 효행록 조선(朝鮮)조의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이 있다.
공(公)의 자손으로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족보에 끊이지 않고 공훈(功勳)과 큰 업적(業績)으로 역사에 두드러진 분들이 대(代)를 이으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난 분들이 역대에 많았으나 세월이 이미 오래 되고 전쟁의 피해를 여러번 거쳐서 공(公)의 묘소(墓所)가 있는 곳을 확실하게 몰라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여 자손들의 통한(痛恨)이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단기 4278년 을유(乙酉)년 광복(光復) 후에 국내의 고적(古蹟)과 문화(文化)를 발굴하고 보존하는데 힘을 기울이자 각지(各地)의 자손들이 여러차례 모여 의논하기를 “문효공(文孝公)의 묘소는 족보의 기록에 따르면 모량(牟梁)의 30왕릉 아래에 있다 하였고 또한 지방의 고로(古老)들의 전해오는 말에 여기가 효자릉(孝子陵)이라 한다하니 실로 이것은 선조(先祖)의 영령(英靈)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늘이 그 효성에 감응하여 구비(口碑)로써 전하게 하였음이니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의논을 마친뒤 7년 정미(丁未)년에 묘소수호보존회(墓所守護保存會)를 구성하고 비로소 향화(香火)를 받들었다.
1986년(丙寅)에 대전(大田)에 사는 문효공 44세손인 기철(基喆)이 비석을 세워 묘도(墓道)를 표시하려 공(公)의 사적(事蹟)과 그 동안의 경과를 가지고 나에게 와서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우리 조상의 비(碑)를 세우는 것이 비록 늦었다 하겠으나 이제 좋은 글로 드러내는데는 그대의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나의 부천(膚淺)함으로 감히 이 청을 감당할 수 없으나 신라(新羅)의 초기에 대수부(大樹部)에서 시조왕을 추대하였는데 문효공(文孝公)은 대수부의 후손(後孫)이고 나 역시 시조왕(始祖王)의 후예이니 어찌 감복되는 의리(義理)가 없겠는가?
이에 그 사적과 경과(經過)에 의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명(銘)하여

하늘이 대효를 내시어
어머니를 위해 아들을 묻으려 하니
땅에서 석종(石鐘)이 나와
그 효성을 표창하셨다네
임금님이 쌀과 집을 하사하여
그 뜻을 기리었다네
신라와 고려이래로
그 높은 이름 사라지지 아니하여
역사에 기록되었을뿐더러
초동목부(樵童牧夫)들도 칭송하였는데
지나는 나그네들 모두 공경하고 듣는 사람들 그 뜻 우러르리라.

단기 4219년(丙寅) 2월 일
숭덕전 참봉 박희봉 삼가 지음
밀양 영운공파 경식 삼가 씀
밀양 진사공파 기철 삼가 세움




-原文-

新羅孝子文孝公 孫順墓碑銘 幷序
辰韓六部村長 推戴新羅始祖王 大樹部村長俱禮馬 其一也 而至儒理王朝 賜姓孫 東方孫氏 自此始焉.
憲德王時 有諱順 諡文孝 太子舍人 諱鶴山之子也. 娶牛岑太守 白永之女 而天性至孝 養親無不用其極 父歿家勢貧寒 傭作以養母 有兒每奪母食 公難之 謂妻曰 『兒可復得 母難再養』 乃負兒 入醉鄕山北 掘地將埋之 忽?然有聲 視之 乃石鐘也. 夫妻警怪相語曰 『得物 殆兒之福也 不可埋也』 遂負兒 携鐘而歸 懸於樑撞之
聲聞王宮 王使人審之 具奏其由 王曰 『昔郭巨췐子 天賜金釜 今孫順埋子 地出石鐘 孝之所感 前後同符』 乃命藏於樂府 賜公宅牟梁一區 歲給粳米五十石 帛二匹 卽興德王十年乙卯也.
事具載於三國遺事 麗史之孝行錄 李朝之三綱行實錄 輿地勝覽等書.
公之子孫 分居八域者 其麗不億 而名公巨卿 譜不絶書 封時勳業 史載相承 文章德行 昭著列朝 然而年代已久 兵?累經 公之墳墓 未知的地 香火未奉 後承之痛恨 晝宵深切矣.
檀紀四千二百七十八年 乙酉光復後 國內古蹟文化發現傾心 各地姓孫累次會合相議曰 『文孝公墓所 譜牒記載云 在牟梁三十陵之下 且地方古老相傳之說 此孝子陵云謂 則實是先祖英靈不泯 天應爲孝 傳乎口碑則 小無疑慮耳.』
定論後七年丁未 墓守護保存會結成 始奉香火 而歲丙寅 大田居住 四十四世孫基喆 將竪碣以表阡 袖公事蹟及中間經記 請銘於不М曰 『吾祖之碣 雖云晩矣 今可以顯詩 願?惠於吾子.』 願玆膚淺 不敢當是寄 然而新羅之初 大樹部推載始祖王 文孝公大樹部之后也 余亦始祖王之后 則豈無感服之義耶.
遂依其事蹟 與經紀而敍之. 銘曰
天生大孝 爲親埋兒. 地出石鐘 以彰其孝.
王賜米屋 又助報應. 羅麗以降 不朽令名.
非徒竹帛 樵牧口頌. 過者必式 聞者欽仰.
檀紀四千三百十九年 丙寅二月 日
崇德殿 參奉 朴熙鳳 謹撰
密陽 嶺雲公派 敬植 謹書
密陽 進士公派 基喆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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