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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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전 효자(孝子)의 피는 지금도 흐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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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06-10 11:19 조회2,4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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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효자상수상을 보고
-편집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하였다.
칠십평생을 흠없고 본보기로 살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기 우리들이 사는 극히 개인주의적이요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 부모님을 하늘같이 모시고 평생을 살아온 손석린(孫錫麟) 족인(族人)의 이야기는 출천대효 시조 할아버지의 높은 뜻이 아직도 우리 자손들의 가슴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경의(敬意)가 표해진다.
손석린씨는 전북 진안군 부귀면 태생으로 시조 할아버지의 46세손이요 목사공(牧使公) 휘 책(策)의 22세손이다.
지금은 전주시에 살고 있는 그는 젊은 시절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도 부모님의 곁을 떠나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려서는 전통적인 유학자(儒學者)의 집에 태어나 선친(先親)의 엄한 교훈을 받고 언제나 가르침에서 벗어난 삶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출필고지(出必告之)하고 반필배지(反必拜之)하다는 교훈은 평생을 어긴적이 없고 이제까지 밤이면 반드시 금침(衾寢)을 준비하여 드리고 새벽이면 문안드리고 이불을 개고 변기(便器)를 비워 드리는 생활을 개을리 한 적이 없었다.
밖에 나가 색다른 먹을 거리를 보면 반드시 가지고 돌아와 부모님께 맛보여 드리고 옆에서 보는 식솔(食率)들의 생활도 언제나 가장(家長)의 본을 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직장에서 돌아올 때는 철따라 부모님의 식성을 생각하여 시장에 들려 맛있는 찬거리를 반드시 손에 들고 들어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머니께서 병환을 얻어 신음하시게 되었는데 백방으로 간호하고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다녔지만 백약(百藥)이 무효라 하늘을 우럴어 기도하고 어머니의 회소(回甦)를 그렇게 빌었건만 차도는 없고 점점 기력(氣力)을 잃어 가셨다.
홀연히 옛 어른들의 열지관혈(裂指灌血)의 가르침이 생각나서 손가락을 자르고 어머니의 입에 주혈(注血)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게 겨우 5일간의 연명(延命)으로 어머니를 떠나 보내게 되었다.
땅을 치고 통곡을 하여도 가신 어머니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상장제례(喪葬祭禮)를 선인(先人)들의 가르침 따라 준행하고 나니 온 세상이 텅빈 공허(空虛)함으로 마음의 빈곳을 채울 길이 없었다.
더구나 칠십(七十)고개를 넘어선 부친의 상배(喪配)를 당한 허전함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지 갑갑한 마음 달랠 길이 없어 석린씨는 그날부터 아버지 곁에서 잠자리를 지키며 외로움을 덜어드리려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어머니의 가신지 꽤 여러해가 되었지만 초하루 보름과 기제(忌祭)날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주과(酒菓)를 들고 산소를 찾는 일을 빼지 않고 있다.
전주향교(全州鄕校)의 전의(典儀)이기도한 석린씨의 지성스런 효성에 이웃들은 물론 전주(全州)의 유림(儒林)과 향교에서 그 효성을 표창을 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이 사실을 알려 포상을 신청하니 모두들 출천대효(出天大孝)의 후손답다고 입을 모으며 혼탁하고 윤리(倫理)가 땅에 떨어진 세태(世態)에 모범이 되고 등불이 될 것이라며 효자(孝子)의 출현(出現)을 칭송하면서 표창장을 주었다.
과연 우리 손문(孫門)은 효자(孝子)의 후예임이 자랑스럽고 모든 자손들이 본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필자는 본인의 생활을 뒤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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