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종친회회보

손긍훈은 누구인가? (답글 감사합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손동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9-10 14:53 조회3,163회 댓글0건

본문


저의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1. 벽상공신29위중에서 공훤이라는 이름이 없는 이유:

29위의 고려벽상공신은 홍유(洪儒:殷悅),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黔弼), 김선궁(金宣弓), 이총언(李忿言),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윤신달(尹莘達), 최준옹(崔俊邕), 문다성(文多省), 이능희(李能希), 이도(李棹), 허선문(許宣文), 구존유(具存裕), 원극유(元克猷), 금용식(琴容式), 김훤술(金萱術), 한란(韓蘭), 강여청(姜餘淸),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係弘), 나총례(羅聰禮), 이희목(李希穆), 염형명(廉邢明), 최필달(崔必達), 김홍술(金弘述), 김락(金樂) 등입니다.

태조왕건이 삼국을 통일을 한후 특별히 공을 세운 65분의 공신들에게 선물을 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벽상공신중에서 65인의 이름에 기록이 없는사람도 절반이 됩니다. 그러나 29위의 벽상공신중에서 65분안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이름으로 표기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가문의 시조공의 행적에는 기록이 있지만, 고려사, 삼국사기에는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확인이 어려운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최준옹(崔俊邕), 문다성(文多省), 허선문(許宣文), 구존유(具存裕), 원극유(元克猷), 금용식(琴容式), 강여청(姜餘淸),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係弘), 나총례(羅聰禮), 이희목(李希穆), 염형명(廉邢明), 최필달(崔必達)입니다.

(***아래 기록참조)
제1등 공신에
1.홍 유(洪 儒, 賜名 殷悅 ; 은열이란 이름을 내림. 남양 홍씨의 시조),
2.배현경(裵玄慶 ; 경주 배씨의 중시조),
3.신숭겸(申崇謙 ; 평산 신씨 시조),
4.복지겸(卜知謙 ; 면천 복씨 시조)으로 지정하고

제2등공신으로
5. 견 권(堅 權),
6. 능 식(能 寔),
7. 권 신(權 愼),
8. 염 상(廉 湘),
9. 김 낙(金 樂 ; 당악 김씨 시조)
10.연 주(連 珠),
11.마 난(麻 煖),
12.최 응(崔 疑 ; 개성 최씨의 원조),
13.유금필(庾금弼 ; 평산 유씨 시조)
14.김선평(金宣平 ; 안동 김씨 시조),
15.장 길(張 吉 ; 賜名 貞弼 ; 정필이란 이름을 하사; 안동 장씨 시조)
16.류차달(柳車達 ; 문화 류씨 시조),
17.이 도(李 棹 ; 전의 이씨 시조),
18.함 규(威 規 ; 양근 함씨 시조),
19.김선궁(金宣弓 ; 선산 김씨 시조),
20.왕희순(王希順),
21.김훤술(金萱述 ; 해평 김씨 시조)
22.윤신달(尹辛達 ; 파평 윤씨 시조),
23.박윤웅(朴允雄 ; 울 박씨 시조),
24.왕식렴(王式廉),
25.진 평(陳 評),
26.박희술(朴希術),
27.김홍술(金洪述),
28.박수경(朴守聊),
29.홍 규(洪 規 : 홍주 홍씨 시조),
30.총 일(聰 逸),
31.강궁진(姜弓珍 ; 금천 강씨 중시조),
32.이총언(李총言 : 벽진 이씨 시조),
33.이능희(李能希 : 청주 이씨 시조),
34.이견웅(李堅雄 ; 수안 이씨 시조),
35.지중익(池重翼, 賜姓 魚重翼 ; 어씨라는 성을 하사함, 충주 어씨 시조),
36.예 언(倪 言),
37.제 궁(제 弓),
38.사도귀(思道貴),
39.최준옹(崔俊邕),
40.한 란(韓 蘭 ; 청주 한씨 시조),
41.전종회(田宗會),
42.관 준(寬 駿),
43.만 세(萬 歲),
44.조 암(趙 岩 ; 改名 孟 ; 풍양 조씨 시조),
45.경함필(卿含弼),
46.영 준(英 俊),
47.김 길(金 吉 ; 광산 김씨 선조),
48.김 철(金 哲),
49.금 강(금 剛),
50.곡긍회(曲矜會),
51.배운태(裵運泰),
52.국 현(國 鉉),
53.적 철(狄 鐵),
54.열 평(烈 評),
55.황보선장(皇甫善長),
56.송 회(宋 會),
57.석 담(昔 淡),
58.조 창(曺 昌),
59.유지방(柳志防),
60.황 승(黃 勝),
61.홍 관(洪 琯),
62.석 광(昔 光),
63.임 정(林 程),
64.장 개(蔣 凱),
65.염 뢰(廉 쾨)
등을 지정하고
,각각 금은기(金銀器)와 금수기(金繡綺), 피욕(被褥)과 능라(綾羅)와 포백(布帛)과곡미(殺米)를 차별있게 하사하였다.


* 벽상공신에 있는 남평문씨의 문다성, 봉화금씨의 금용식, 능성구씨의 구존유등 ,,,,많은 개국공신들의 이름을 확인 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65인의 공신중에 벽상공신의 이름들이 다른이름으로 표현되어있을 것입니다. 손긍훈대장군도 다른이름으로 기록되어있을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것은 "고려사"는 조선태종,세종때의 정인지를 중심한 학자들이 역사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한 책입니다. 500년이 흐르는 가운데 뒤덤벅이 된 자료를 통해 재정리한 내용이므로 기록이 많이 빠져있거나 크고 작은 오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또하나, 통일신라시대는 이두라는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이두는 소리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시대였습니다. 한국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통해 문자를 보급하면서 한글문자를 기록하고 사용하지만, 그당시 사람들은 말하는 소리를 한자로 기록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소리나는 대로 한자를 사용하다보니 기록했던 한자가 모두 혼용이 된것입니다.


왕건의 아버지를 어떤 기록에는 용륭,또다른곳에는 왕륭으로 기록하고, 견훤을 어떤곳에는 진훤으로 기록되어있는 것도 당시에는 소리발음대로 한자를 그대로 기록해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일본의 문자가 히라가나 카타카나, 한자를 혼용하는데 히라카나와 카타카나는 고대통일신라시대의 이두와 비슷한 문자입니다. 한자의 문자를 간자체로 하나의 획수만 따와서 소리나는 발음대로 기록하는것이 일본어입니다.

* 한자표기에 집착해서 본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한자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빌려온 문자일 뿐입니다. 한국사람의 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빌린것이 한자입니다. 그점에서 소리에 대한 발음을 유의한다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손긍훈시조공의 업적을 조금이나 찾을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훤이 왜 손긍훈일 가능성높은 이유는 크게 몇가지 있습니다.

1. 대장군이 되었다는 점(*대장군은 전쟁시 3군의 총관으로 사용. 소정방, 도쿠가와등)
2. 후백제를 평정했다는 점.
3. 신검을 생포해서 잡았다는 점.
4. 왕식렴(왕함윤)부자와 같이 출전한 점.
5. 공훤과 긍훈의 발음은 가장 비슷한 점.(한자문자로보다는 소리음이 비슷한 사람이 더 유력함)
6. 전쟁터가 경상도(선산)일대였다는 점.(만약 전쟁터가 경기도나 강원도였다면 유금필, 왕식렴을 대장군으로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선산이었기 때문에 동원된 현지병사와 지형,지물를 잘아는 현지장군을 책임자로 세우는것은 기본상식)

----------

아무튼 다양한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위와 같이 제시된 자료를 숙지하고 다시한번 재해석하는 가운데
보다더 활발한 종사연구를 기대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