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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손긍훈은 금준인가? 공훤인가? (수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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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손교영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9-09 11:57 조회3,0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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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하여 다시 글 올려주신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 문중의 중시조이신 광리군(廣理君)할아버지에 관하여 상세하게 조사하시고 자세하게 글을 올려 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리며. 수정하여 다시 글 올려주신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긍훈(兢訓)할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신대로 고려 건국 때 공훈을 인정받아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지시고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추증되신 분이십니다. 관련 기록이 밀양지(密陽誌)나 기타 옛 족보등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파주 통일전망대 맞은편에 건축되어 있는 고려대전(高麗大殿)에 고려개국 공신으로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고려조에 대대로 벼슬과 녹봉을 받은 신하들의 방명을 수록하여 화벌보(華閥譜)라 이름하는 책자를 만들었으나 그후 성종조에 불태워 버렸다고 전해 지고 있는데 이 화벌보(華閥譜)에 손긍훈(孫兢訓)과 후손들이 모두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화벌보는 현재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앞의 고려대전에 봉안된 고려 공신 354명을 살펴본 바, 공훤(公萱)과 비슷한 이름이 공권(公權)과 공원(公元)이 있으나 고려사에 나와 있어 긍훈(兢訓)과는 다른 분일 것이며, 화벌보(華閥譜)에 나와 있는 고려공신 29명도 공훤(公萱)과 비슷한 이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전국종친회에서도 긍준(兢俊)과 긍훈(兢訓)이 동일 인물인가 하여 홍성을 방문하였던 적이 있으나 동일 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위와같이 긍훈(兢訓)할아버지에 관하여는 안타깝게도 정사(正史)에는 나타나 있지 않아서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여야할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손동훈님께서 조사해 주신 내용을 검증하여 앞으로 역사적으로 검증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종원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많은 지도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종친회에 깊은 관심을 부탁드리며 홈페이지에도 자주 들러주시고 좋은 글도 올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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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동훈] 손긍훈은 금준인가? 공훤인가? (수정판) (2011-09-08 10:31)
손긍훈은 긍준인가? 아니면 공훤인가?

고려사에는 손긍훈대장군의 이름과 비슷한 인물들이 있다. 그중에서 긍준과 공훤이 가장 유력한 인물이라 예측 할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고려사에 나타나는 긍준(兢俊)을 살펴보자 : 운주(홍성)는 궁예의 후고구려에 복속되었다가(904년), 궁예가 왕건세력에 축출당하자 홍성일대는 후백제에 투항하였다(917년:태조원년8월). 그러나 927(태조10년3월)년 운주성주긍준은 고려군에 대파되었다. 그렇다면 936년 선산 일리천전투에 나오는 대상긍준이 고려에게 대파된 후백제의 운주성주금준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손긍훈대장군을 말하는지 또 다른 어떤인물을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길이 없다.

다만 추측컨대, 선산일리천전투에서 명주(강릉)대광 왕순식일족과 함께 대상금준은 중군의 후방본진에 편성되어 있고, 대상유금필장군이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 있었다는 점에서 금준은 왕순식과 비슷한 지방호족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진다. 공주대학교 박물관장 윤용혁교수는 고려에 패한 후백제의 운주성주 긍준은 홍규(후비홍씨의 아버지)와 동일인물로 추정했다.

고려태조는 지방호족세력을 통합하기 일환으로 정략적인 혼인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운주(홍성)사람이였던 삼중대광 홍규의 딸이 12번째 후비 홍복원부인 홍씨로 태조와의 사이에서 왕자 직과 공주 일후를 낳았다(고려사, 권38 열전1)고 기록되어있다.

다음으로, 공훤(公萱) 대해서 알아보자. 공훤은 고려의 장군으로 관직은 시중, 대상, 대장군을 역임했으며, 후삼국 통일의 공로가 실로 크다. 그렇다면, 고려사,삼국사기에 나타난 공훤의 기록 살펴보자.

927년(태조10/경애왕 4) 9월에 후백제 견훤이 근품성(상주)을 공격하여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영천)를 습격하여 경주까지 핍박하니, 신라왕이 연식을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가서 그 급박함을 알렸다. 임금이 시중공훤과 대상손행과 정조연주등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우리와 더불어 동호한 지 이미 오래인데, 지금 급박하니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공훤등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더니, (구원병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경애왕은 안심을 하고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구원병이 이르기 전에 견훤은 갑자기 신라 도성에 들어갔다 ; 甄萱攻燒近品城 進襲新羅高鬱府 逼至郊畿 新羅王遣連式 告急 王謂侍中公萱 大相孫幸 正朝聯珠等曰 新羅與我同好 已久 今有急 不可不救 遣公萱等 以兵一萬 赴之 未至 萱猝入新羅都城 [고려사 권제1, 20장 앞쪽~뒤쪽, 세가 1 태조 10.9]

929년 12월 견훤이 고창군(古昌郡:지금의안동)을 포위하자 대상(大相)공훤은 태조를 따라 출정하였다. 이때 대상공훤과 홍유(洪儒)가 태조에게 “만약 우리가 싸움이 불리하면 죽령(竹嶺)으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미리 샛길을 닦아두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아뢰었으나, 유금필(庾黔弼)이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은 그대로 적에게 주는 것이니 급히 진군하여야 한다”고 반대하여 관철되지 못하였다.

935년 4월 나주의 40여 군(郡)이 후백제에 침략되어 신라와 해로(海路)가 통하지 않자, 태조는 이곳을 진무(鎭撫)할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대상공훤과 대광제궁이 유금필을 천거하여 나주지역을 경략하게 하였다.

936년 태조가 삼군(三軍)으로 후백제를 공격할 때 대상공훤은 대장군이 되어 능필(能弼), 왕함윤등과 함께 기병 3백인과 군사 1만 4700인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삼군의 원병을 구성하여 일리천에서 신검(神劍)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로 신검 등의 항복을 받는데 공헌하였다. 참고문헌:『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에는 고려와 후백제의 결전을 벌인 선산 일리천싸움에 대상금준과 대장군공훤의 이름이 나온다. 중군의 본진에 편성된 인물을 살펴보면 명주군 대광인 왕순식, 대상금준, 왕렴, 왕예, 인일이 본대를 형성하고, 대상유금필 관무,관현등이 흑수,달고,철륵등 제번의 강한 기병 9천5백명을 거느리고 정순과 애진등이 보군 1천명을 거느리고, 종희와 견훤등이 보군 1천명을 거느리며, 김극종과 조간등이 보군 1천명을 거느려서 중군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秋九月王率三軍至天安府合兵進次一善郡神劒以兵逆之. 甲午 隔 一利川 而陣王與 甄萱觀兵. 以萱及大相 堅權 述希 皇甫 金山 元尹康柔 等領馬軍一萬支天軍大將軍元尹 能達 奇言韓順明昕岳正朝英直廣世等領步軍一萬爲左綱 大相金鐵 洪儒 朴守卿 元甫 連珠 元尹 萱良等領馬軍一萬補天軍大將軍元尹三順俊良正朝英儒吉康忠昕繼等領步軍一萬爲右綱溟州大匡王順式大相兢俊王廉王乂元甫仁一等領馬軍二萬大相庾黔弼元尹官茂官憲等領黑水達姑鐵勒諸蕃勁騎九千五百祐天軍大將軍元尹貞順正朝哀珍等領步軍一千天武軍大將軍元尹宗熙正朝見萱等領步軍一千杆天軍大將軍金克宗元甫助杆等領步軍一千爲中軍

여기의 왕순식과 왕렴과 왕예는고려 왕건이 왕씨 성을 하사하기 전까지는 모두 명주(강릉)를 기반으로 한 강릉김씨의 호족세력이다. 그리고 유금필과 흑수,달고,철륵의 기병들은 북쪽지역을 기반을 둔 군사들과 발해,여진출신임을 쉽게 알수 있다. 특히, 아버지왕순식과 아들왕렴 사이에 대상금준을 기록한 것은 왕순식과 같은 호족세력임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중군의 주력선봉에 선 인물들을 살펴보자. 대장군 대상공훤을 중심하고 능필, 왕함윤(*왕식렴의 아들)등이 기병3백명과 여러성의 군사1만4천7백명을 거느리고 삼군의 원병(元兵)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乂{又}以大將軍大相公萱元尹能弼將軍王含允等領騎兵三百諸城軍一萬四千七百爲三軍援兵. 鼓行而前忽有白雲狀如劒戟起我師上向賊陣行

삼국사기에는, 대장군 공훤, 장군왕함윤은 군사 1만 5천으로써 선봉이 되어 북을 치며 행렬을 지어 나아가니… ;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삼국사기 권제50, 18장 뒤쪽, 열전 10 견훤]) 그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밀양손씨의 시조공인 손긍훈대장군의 비문에는 고려태조가 손긍훈(兢訓)에게 남정을 명함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김식희 왕식렴과 함께 기병 1만5천을 거느리고, 선산 일리천에서 후백제의 군대를 대파하고 황산군(黃山郡:지금의 연산지방)에서 신검을 생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손긍훈대장군의 비문에서 선산 일리천전투에 손긍훈대장군과 함께 참전했던 김식희, 왕식렴장군의 기록이 있으므로 그들의 행적을 찾으면 손긍훈대장군이 있던 군영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삼국사기에는 그때전투에 왕식렴이 출전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아들인 왕함윤이 대장군 공훤 휘하에 출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당시 왕함윤은 아버지 왕식렴을 대신해서 출전했음을 알수 있다.

과거 전쟁에서는 가족과 일족중심으로 함께 참여한 기록이 많이 있다. 화랑관창이 아버지 김품일장군을 따라 함께 출전했던 것은 그한 예라 하겠다. 그렇다면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왕식렴,왕함윤부자와 함께 있었던 대장군 공훤이 바로 손긍훈대장군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상금준이 대장군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대상공훤은 대장군이 되어서 선산 일리천전투에서 당시 중군선봉에서 3군의 총관으로 통솔했었다. 따라서 대장군이었던 공훤이 후백제를 평정했던 손긍훈대장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고려사에는 대장군 공훤이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신검을 황산에서 생포하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있다.: 王命大將軍公萱直擣中軍三軍齊進奮擊賊兵大潰, 虜將軍昕康見達殷述今式又奉等三千二百人斬五千七百餘級. 賊倒戈相攻我師追至黃山郡踰炭嶺駐營馬城. 神劒與其弟菁州城主良劒光州城主龍劒及文武官僚來降. 王大悅勞慰之命攸司虜

손긍훈대장군 비문에는 후백제군을 평정하고 신검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 기록되어있다. 선산일리천전투에서 황산(연산)까지 추격해서 신검을 포로로 잡을수 있는 부대는 고려의 주력부대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중군의 본진 후방에 있던 대상금준보다는 주력선봉에 있던 대장군공훤이 손긍훈대장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수 있다.

고려사와 삼국사기에는 일리천전투에서 대장군공훤이 직접 통솔한 군병숫자가 1만5천명정도이고, 손긍훈대장군의 비문에도 1만5천명의 인솔했던 기록이 같다는 점에서도 대장군공훤이 손긍훈대장군일 가능성이 큼을 말해준다.

손긍훈대장군의 시호는 무열공으로 삼중대광사도 廣理君으로 봉해졌다. 손긍훈대장군이 廣(넓히다)理(다스리다,평정하다)君(대군,임금,왕)으로 봉해진 것은 밀양의 옛고명이 광리라고 하는 일설도 있지만 근거가 없는 듯하다. 짐작컨대,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손긍훈대장군이 후백제군을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큰 수훈을 세움으로써 나라를 넓게 평정하였다는 뜻에서 내린 봉호가 아닌가 생각된다.

후삼국 인물열전을 보면 상당수가 성이 누락된 경우가 많다. 견훤의 아버지도 이씨인데 이아자개라고 하지않고 견훤도 이씨를 따르지 않고 견훤이라고 자칭하였다. 고려왕건도 부친의 이름이 왕륭이었으며 조부는 작제건이였고 작제건의 성은 아예 알수가 없다.

그리고, 복지겸의 초명은 복사귀이였고, 배현경의 초명은 백옥삼이였다. 백옥삼은 백의 음을 따서 성을 배현경으로 한것과 왕륭이 용륭으로, 이능필에서 이능일로 바뀐 경우나 궁예를 따르던 貴平과 歸評은 같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먼저 그당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면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는 거란과 몽고의 침입과 수많은 전란과 내란으로 중요한 자료는 대부분 소실되고 파괴되면서 다시 수습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표기상 혼선을 빚는 예가 흔히 나타난다. 대장군 공훤도 성은 빠지고, 비슷한 한자발음으로 기록됨으로써 혼선이 빚어졌던 그 한 예라고 하겠다.

손긍훈대장군의 진면목을 살펴본다면, 진성여왕이후 신라는 사회적으로 혼란함을 틈타 많은 비적들이 전국적으로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을 때 손긍훈은 추화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밀양청도일대의 군사적 집단세력으로 성장했다.

손긍훈은 강력한 군사적 세력으로 성장했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의로움이 강했기에 도적의 무리로 변질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고 지역을 수호하는데 힘써 노력했다. 손긍훈이 청도 대작갑사(운문사)에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화랑의 세속오계를 가르쳐서 올바른 국가관과 정신교육에 힘썼던 것을 보아서 그의 정의로운 올바른 성품이 잘 나타나 있음을 알수 있다.

밀양청도일대를 근거지로 한 강력한 군벌로 성장할수 있었던 것은 출중한 무예와 뛰어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신라가 멸망할 것을 알고, 고려태조에게 찾아갔던 것은 시대를 정확히 내다보는 혜안과 지혜가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그리고, 고려조정에서 상신인 시중, 대상, 대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밀양청도일대의 강력한 지배자로로써 호족에 가까운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2011년 9월2일 손동훈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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