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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부북면 덕곡리(덕실) 집성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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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9-07-20 16:46 조회3,3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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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부북면 덕곡리(덕실) 집성촌 ②

시조로부터 7세손이 되시는 휘 긍훈(兢訓)께서는 고려건국기에 태조 왕건(王建)과 함께 후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고려삼중대광사도벽상공신(高麗三重大匡司徒壁上功臣) 광
리군(廣理君)에 봉(封)해졌으므로 밀양손문(密陽孫門)의 가세를 더욱 크게 빛내었습니다. 당
시 서기 기원 10세기 초중반에 세거지(世居地)는 대체적으로 이전단계와 유사한 간선지역
즉, 응천강 상류인 청도 운문사(雲門寺)쪽에서부터 오늘날의 밀양시 남천강 쪽으로 확장되면
서 교동의 춘복과 당시로는 추화산(推火山) 내곡(內谷)에 남정촌(南亭村)을 포함하여 부북면
쪽으로 고개를 넘어 신원(新院)과 밀양읍으로 넓혀서 산재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가지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특히 밀양의 남천강(南川江) 상류쪽에서 추화산과
그 내곡에 소재한 남정촌(南亭村) 등등 밀양읍과 부북면 방면의 지역이 서기 기원 514년 법
흥왕(法興王) 이전에는 변한(弁韓) 땅 또는 가락국(駕洛國)에 속했던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중시조 휘 긍훈(兢訓)의 유적으로는 밀양시 교동리 춘복 뒷산에 묘가 있고, 밀양시 추화산성
위 성황사(城隍祠)에 모셔져 있던 광리군(廣理君)의 소상(塑像)은 현재 밀양시 박물관에 옮
겨서 모셔져 있으며, 그리고 밀양시 교동리에 현충사와 신도비와 춘복재가 있습니다. 또한
광리군(廣理君)의 영당(影堂)과 효충사(孝忠祠) 그리고 신도비(神道碑)는 경북 청도, 경남 진
주, 전북 고창과 전남 나주와 보성에 각각 모셔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시조 휘 순(順)으로부터 15세손인 고려조 참지정사(參知政事) 좌복야(左僕射) 휘 변
(퇾) 때를 기준으로 봐도 고종(高宗) 38년 서기 1250년 전후까지는 밀양시 교동리 춘복 즉
남정촌으로부터 신원(新院)으로 넘어 밀양의 대명산(大名山)인 화악산(華嶽山) 앞 자락에 현
재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즉, 당시로는 화악산 정기(精氣)아래 그리고 앞으로는 저 멀리 밀
양읍 남천강(南川江), 그 상류는 응천강(凝川江)을 조망하는 양량(陽良)의 큰마을로 형성되
어 성장하고 번성해가는 위 마을들에서 세거(世居)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19세손인 고려말 서기 기원 1340년경 충렬왕(忠烈王)으로부터 밀성군(密城君)으로
봉해진 휘 빈(贇) 할아버지를 정점으로 양량(陽良:지금의 位良) 마을은 20세손인 휘 광(洸)
광록대부(光祿大夫) 정승(政丞) 판도판서(版圖判書), 21세손 휘 탁() 좌사부좌우교위( 左師傅
左右校尉), 22세손 휘 맹견(孟堅)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23세손 휘 용도(俑道) 생원(生員),
24세손 치호(致豪) 부사직(副司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신 할아버지와 본 글 제일위에
서 언급한 25세손 대종손(大宗孫) 문과현감(文科縣監) 학음공 휘 태좌(台佐) 할아버지때 즉,
조선조 중종(中宗) 1500년 경까지는 세거지로 절정을 이루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
러나 사실상 조선조의 역성혁명을 극복해 나가면서도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사화사
건들에 휘말려 그 동안 융성하고 번창한 위양(位良:구 陽良)의 세거지도 서기 1500년 이후
로는 점차적으로 쇠퇴해 나갔습니다.
서기 1500년말 선조(宣祖)때 28세손 승사랑(承仕郞) 훈도공(訓導公) 휘 충보(忠輔) 할아버지
께서는 의병(義兵)으로 출전하여 전사하시고 가솔은 배위(配位) 광산김씨(光山金氏) 할머니
가 29세손 대종손(大宗孫)인 창조(昌祖) 아드님을 데리고 친정 곳인 영산 길곡마을로 이거
(移居)를 하여 그곳에서 피난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모두 7세동안 세거하다가
말기에 35세손 휘 맹준(孟俊)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비로소 다시 그리웠던 고향 선조님
의 유적이 계시는 밀양 땅으로 조선조 영조(英祖) 말기 혹은 정조(正祖) 시기에 대종가(大宗
家)와 대종파(大宗派)들이 다시 밀양으로 귀향(歸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활터전을 잡기가 곤란하였으며 본래의 부북면 위양리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가문의 집성
촌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하여 밀양군 단장면 감물리, 밀양군 상동면 안인리 등등을 포
함하여 밀양군 부북면 위양리에서 바로 인근 마을인 건너편에 위치한 덕곡리(덕실)에 입향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밀양으로 귀향하여 현재 부북면 위양을 바로 옆에 두고 융성하고 번창한 선조님들의
역사와 찬란한 생활환경을 고찰(考察)하면서 벌써 35세손 휘 맹준(孟俊) 이하 8세손까지 출
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급속한 사회변화와 발전으로 이미 그 동안에도 많은 일가들이 고향에서 떠났지만 산업
화 되는 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이거내지는 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고향의 산천과 선조
님들의 유적과 사적 그리고 선영의 묘는 누가 어떻게 뫼셔야 하겠습니까? 앞날의 일이 걱정
으로 다가옴을 느낍니다.

다음은 여기에 오늘까지 세거(世居)하고 있으며 또한 덕곡리(덕실)에 선조님의 향사 혹은
여러 가지 밀양손씨 대종가(大宗家)나 대가파(大家派) 일가들과의 관계로 출입하는 분들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성일 성대 동식 해동 양조 광조 영호 희덕 태근 희탁 봉규 하근
성복 호경 인규 의웅 희태 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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