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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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손씨 선조민(孫氏 先祖民) 탁족에 대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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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손한종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2-09-18 11:28 조회3,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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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에서 계속>
나. 진한(辰韓)의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기원전(紀元前) 238년 계해(癸亥) 단군조선(檀君朝鮮) 47세 단군(檀君) 고리가대왕(古利加大王) 58년 춘 3월에 단군고조선(檀君古朝鮮)이 멸망(滅亡)하자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이 된 우리 손씨선조민집단(孫氏先祖民集團)의 씨족장(氏族長) 구례마(仇禮馬) 할아버지는 자손들과 의론끝에 탁부족(?部族)들을 이끌고 씨족발상 요람지(氏族發祥搖藍地)로 부터 중화대륙(中華大陸) 탁수지방(?水地方)을 떠나고 동북(東北) 만주대륙(滿州大陸)을 거쳐서 한반도의 동남단(東南端)으로 61년간에 걸쳐 대이동하여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기원전(紀元前) 177년 갑자(甲子) 춘 3월(春三月) 한문제(漢文帝) 3년(年) 진한(辰韓)의 땅인 경주(慶州) 이산(伊山)에 하강(下降) 정착(定着)하여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라는 탁부족(?部族)(古代孫氏先祖民들의 別名)의 씨족부락(氏族部落)을 형성(形成)하고 살게 되었는데 이곳은 우리 손씨선조(孫氏先祖)들이 한반도(韓半島) 진한(辰韓)의 땅에 이주하여 와서 살게 되었던 고향인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고려인종 23년을축(仁宗 23年乙丑)에 왕명으로 편찬한 삼국사기 권제일 신라본기 제일시조조(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始祖條)에서 김부식(金富軾)은 「서라벌에는 일찌기 고조선유민이 와서 산곡간에 헤여져서 여섯부락을 이루고 살으니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이며,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이며, 셋째는 자산 진지촌(珍支村)이라 하고, 넷째는 우리 손씨선조민(孫氏先祖民)의 마을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이라 하였으며,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이고,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라는 마을이니 이것이 진한(辰韓)의 6촌이다」고 하였다.
또 고려(高麗) 충열왕(忠烈王)때 보각국존(普覺國尊) 일연대사(一然大師)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쓰면서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조(赫居世王條)에 6촌의 유래(由來)에 대하여 「진한의 땅에는 6촌이 있었는데」
「一은 알천양산촌(閼川 梁山村)으로 남쪽은 지금 담엄사(曇嚴寺)이고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라는 분인데 처음으로 표암봉(瓢岩峯)에 내려오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다. 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 이름을 붙였는데 고려태조(高麗太祖) 천복5년(天福五年)에 중흥부(中興部)라 개명(改名)되어 지금(忠烈王時)은 피잠(彼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二는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분으로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오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최씨(崔氏)의 조상(祖上)이다. 지금(高麗太祖時)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니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三은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라는 분인데 처음 이산(伊山)에 내려오니 이가 점량부(漸梁部)-梁은 탁(?)이라고도 쓴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시다.-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 하니 (高麗忠烈王時)의 박곡촌(朴谷村)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四는 자산 진지촌(珍支村)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는 분인데 처음으로 화산(花山)에 내려오니 이가 본피부(本彼部) 정씨(鄭氏)의 조상(祖上)이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니 시파(柴巴)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五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으로 촌장은 지타(祇陀)라는 분인데 처음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오니 이가 한기부(漢岐部) 배씨(裴氏)의 조상(祖上)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 하니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내아(乃兒)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六은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니 촌장(村長)은 호진(虎珍)이라는 분으로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오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 하니 물이보(勿伊寶)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이 진한 6촌의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은 그로부터 209년후인 서기 32년 서라벌 제 3대 유리비사금(第三代 儒理比師今)(儒理王) 9년 임진(九年壬辰) 봄에 6촌을 6부로 승격시켜서 이름을 고치고, 이어 성씨(姓氏)를 사성하니, 양산촌(梁山村)을 양부(梁部)라 고치고 이씨(李氏)를 사성하고, 고허촌(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라 고치고 최씨(崔氏)를 사성하고 대수촌(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라 고쳐서 손씨(孫氏)라고 사성(賜姓)하였으며, 우진촌(于珍村)을 본피부(本彼部)라고 고치고 정씨(鄭氏)라고 사성(賜姓)하고 가리촌(加利村)을 한기부(漢岐部)라 고치고 배씨(裵氏)를 사성하였고, 명활촌(明活村)을 습비부(習比部)라 고쳐서 설씨(薛氏)를 사성하였다.
그 이후로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은 점량부(漸梁部) 혹은 점탁부(漸?部) 및 모량부(牟梁部) 또는 탁부(?部)라 불리게 되었고, 이 마을에 사는 우리 선조(先祖)들이 한반도 진한(辰韓)과 사로국사회(斯盧國社會)에서 비로소 손씨(孫氏)의 성(姓)을 가지고 오늘날 까지 1967년동안 면면이 이어와서 40만의 대종성(大宗姓)으로 번성하고 있다.
위와 같이 신라(新羅) 3대 유리왕(三代 儒理王)이 후한(後漢)의 무제(武帝) 8년에 한(漢)나라 거성(巨姓)들의 성씨(姓氏)를 따서 사로 6부에 이씨(李氏), 최씨(崔氏), 손씨(孫氏), 정씨(鄭氏), 배씨(裵氏), 설씨(薛氏)를 사성하였다는 것은 신라 6부의 성씨(姓氏)가 당시 신라사회(新羅社會)의 현실적 위상(位相)에서 이러한 성씨(姓氏)들이 한대사회(漢代社會)에 있어서의 용서(龍西)의 이씨(李氏), 청하박능(淸河博陵)의 최씨(崔氏), 낙안(樂安)의 손씨(孫氏), 영양(英陽)의 정씨(鄭氏), 하동(河東)의 배씨(裵氏)와 설씨(薛氏)등의 명문대족(名門大族)에 비례안배(比例按配)하여 붙여 준 성씨임을 알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통일 이전까지의 고대부족국가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고 고조선시대의 풍습에 따라 자기가 살고 있던 고향부락(故鄕部落)의 이름을 출신으로한 우리말 사투리 방언(方言)을 이름으로 쓰고 그 이름 밑에 지(智), 지(知), 형(兄), 웅(雄), 진(進), 난(難), 평(平), 차(次), 예(豫)등과 같은 존칭(尊稱)을 붙이고 그 밑에 대사(大舍), 이간(伊干), 대아간(大阿干), 급간(及干), 나말(奈末), 길지(吉之), 사척간(沙尺干), 대나말(大奈末), 소사(小舍)등의 관위(官位)나 외위(外位)를 붙여쓰는 것이 상례(常例)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신라 24대 진흥왕대에 건립한 경남창령비(慶南昌寧碑) 서울 북한산비(北漢山碑) 함흥황초령비(咸興黃草嶺碑) 단천마설령(端川摩雪嶺)에 남아 있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碑)와 25대(代) 진지왕 3년(眞智王三年)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술무오작비(大邱戌戊塢作碑)와 26대 진평왕대(眞平王代)에 건립된 도세남산신성비(度世南山新城碑)등을 보면 성(姓)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고조선시대의 출신지를 성(姓)으로 사용한 데서도 알수 있다 하겠다.
무산 대수촌 손씨(茂山 大樹村 孫氏)마을은 신라에 와서 유리비사금 3년(儒理比師今三年)에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라 이름을 고쳤는데 일반적으로 속칭(俗稱)으로는 탁(?)혹은 탁수지방(?水地方)에서 살던 때문에 탁족(?族)이라 불리웠다.
그후 약 1000년 정확히 927년이 지난 고려에 와서는 고려태조천수(高麗太祖天授) 23년 서기 940년 춘3월 제주현(諸州縣)의 명칭을 고치면서 장복부(長福部)라 개칭하고 고려말인 충열왕(忠烈王)때에 와서는 박곡촌(朴谷村)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하였고 현재는 경상북도 경주시 모량천(慶尙北道 慶州市 牟梁川)이 흐르는 서면(西面)과 현곡천(見谷川)이 흐르는 일대가 고대 우리 손씨(孫氏) 선조민(先祖民)이 살았던 진한(辰韓)의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마을이였다.
이 마을은 부족사회(部族社會)때는 씨족장(氏族長) 구례마(仇禮馬) 밑에 이찬을 두고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다스리던 소부족국가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마을은 목책(木柵)으로 성(城)을 쌓고 정병(精兵)의 군사(軍士)까지 상비(常備)하고 외적(外敵)을 방비(防備)하였으며, 주민들은 이두문(吏讀文)과 고조선진한(古朝鮮辰韓)의 방언을 사용하면서 농업과 농상업을 주업으로 노적(露積)가리를 쌓아놓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여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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