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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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인물 ◇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손화중(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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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2-09-18 11:07 조회2,8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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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장군과 농민봉기 주도 35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산화(散華) -


공(公)의 휘는 정식(正植)이요 자(字)는 화중(華仲)이요 호(號)는 초산(楚山)이니 입암공(笠巖公) 휘 비장(比長)의 13세손이요 대교공(待敎公) 휘 홍적(弘績)의 10세손이며 임란절신(壬亂節臣) 초은공(楚隱公) 휘 승경(承憬)의 9세손으로 선고(先考)의 휘는 호열(浩烈)이다. 철종(哲宗) 신유(辛酉)년 (1861년) 6월 27일에 정읍시(井邑市) 과교동(科橋洞) 음성(陰城)에서 태어났다. 공(公)은 체구(體軀)가 건장하고 용모가 훤칠하여 사람들이 위압을 느끼는 기상이었으며 기품(氣品)이 활달하고 도량(度量)이 넓어 사소한 일에는 대범하여 이웃 사람들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 기대가 컸다. 그러나 당시의 시국이 부패하여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져 신음하는 것을 보고 일찌기 지리산으로 들어가 심신을 닦던 중 뜻한 바 있어 동학에 입교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정읍(井邑)과 부안(扶安)을 거점으로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공(公)은 접주(接主)가 되어 고창(高敞)의 무장(茂長)으로 옮겨 지금의 고창군 무릉면 덕점리 양실에 접소(接所)를 두고 포교(布敎)한바 그 세(勢)가 전라도 일대를 압도하였다. 그는 도솔암 마애불(磨崖佛)의 배꼽에서 비장되어 있던 검단선사(黔丹禪師)의 비결을 꺼낸 장본인(張本人)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학의 초대교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선생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모인 삼례(參禮)의 집회에는 손화중포(孫華仲包)의 신도들이 가장 많았다. 이에 따라 관헌(官憲)들의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전봉준(全琫準)장군이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위한 무장봉기(武裝蜂起)에 나서자 전봉준 군(軍)은 전주에서 손화중군(孫華仲軍)은 나주(羅州)를 그리고 김개남(金介南)군은 남원(南原)에서 봉기하였다. 공(公)은 그해 7월에 최경선(崔景善)군이 나주(羅州)를 공격할때 본군을 투입하여 역전(力戰)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시국(時局)의 수습책을 내놓자 동학군은 자진 해산하여 각기 생업으로 돌아갔다. 전라도 각군에 집강소(執綱所)를 두고 전주에는 대도소(大都所)룰 두어 전봉준(全琫準)이 총지휘하고 탐관오리의 학정을 감찰(監察)하여 시국이 차츰 안정되어 가는 듯 했으나 조정에는 청일(淸日) 양군의 전쟁으로 청군이 패퇴(敗退)하고 왜병(倭兵)들과 관군이 재차 토벌에 나서자 동학군(東學軍)은 총궐기하여 북접(北接)은 손병희(孫秉熙)장군이 이끌고 남접(南接)은 전봉준장군이 지휘하여 공주(公州)의 우금치(牛今峙)에서 관군(官軍)에게 대패하였다. 이때 공(公)은 또다시 나주(羅州)를 공격하였으나 공주의 패배로 힘을 잃고 광주(光州)로 철수하였다가 12월 1일에 농민군을 해산하고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의 강씨(姜氏) 재실(齋室)에 잠복해 있다가 이봉우(재실지기)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최경선(崔景善)과 함께 서대문(西大門)감옥에서 일생을 마쳤다. 공(公)은 마지막 가는 길에 “내 백성을 위하여 힘을 다했는데 사형(死刑)을 당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호통을 치며 한많은 생을 마쳤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바친 공(公)의 한평생은 영원히 우리의 귀감이 될 것이다.
공(公)의 묘소(墓所)는 고향 정읍(井邑)의 음성(陰城) 석현방축(石峴防築) 위 임좌(壬坐)에 있고 부인(夫人) 고흥류씨(高興柳氏)는 공(公)과 합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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