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회보

종친회회보

밀양손씨 문중 큰 별 지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2-09-18 11:00 조회4,101회 댓글0건

본문

- 고(故) 중야(中좝) 손무상옹(孫戊尙翁)을 보내며-

중야(中좝)선생의 휘(諱)는 병룡(秉龍)이고 무상(戊尙)이라 불렀다. 중야(中좝)는 그의 아호(雅號)이며 시조 문효공(文孝公)의 42세손이요 창녕(昌寧)에 입향하신 첨정공(僉正公) 휘 수산(壽山)의 18세손이다. 부친 승한(升漢)과 밀양박씨(密陽朴氏)사이에서 독자로 1909년(戊申) 2월 10일에 태어났고 누이 두분이 있다. 가정이 몹시 궁핍한 환경에서 태어나 전통적으로 유교(儒敎)를 숭상하던 가풍(家風)으로 5~6세때부터 서당(書堂)에 다니며 부지런히 공부하였고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장래의 희망을 바라보고 온 집안이 활기차게 생활하였으나 8세때부터 부친이 병석에 눕게 되어 열심히 간병(看病)하였으나 13세때 천지가 무너지는 부친의 상사(喪事)를 당하게 되었다. 앞길이 막막하기만 하였다. 편모(偏母)슬하에 지성으로 효(孝)를 다하며 가난과 싸웠으나 의식(衣食)을 해결하기조차 힘들었다. 17세에 결혼하여 갖은 일을 다하면서 -심지어는 행상까지- 발버둥쳤으니 생활이 나아지기는 커녕 소작(小作)을 하던 논밭에서 흉년이 들어 곡수(穀收)를 낼 수가 없었으나 지주(地主)는 소작을 떼겠다고 협박하니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게 되었다. 선생은 드디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유지경성(有志竟成) -뜻이 있으면 이룰 수 있다 - 이라는 네글자를 가슴에 굳게 새기고 일본(日本)행을 결심하였다. 걸어서 밀양역(密陽驛)까지 가서 부산(釜山)에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에 몸을 싣고 일본(日本)에 계시던 삼종숙(三從叔)을 찾아갔다. 뒷날에 선생은 그때의 자신의 행색(行色)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한복(韓服)차림에 미투리를 신고 머리에 갓을 쓰고 상투 틀고 일본땅에 나타났더니 거리에서 사람들이 마치 동물원 구경하듯 하더라”하시며 껄껄 웃었다. 이때부터 선생의 고생은 살을 깎고 피를 말리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쓰레기 소각장의 인부로부터 공장의 직공으로 전전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야말로 곁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천성(天性)부지런하고 청렴정직한 선생의 생활이 일본인들의 두터운 신망(信望)을 얻게 하였다. 1935년 8월 18일 드디어 작으나마 자신의 공장(工場)을 갖게 되었다. 온갖 힘과 정성을 다하여 불타는 자립의지(自立意志)로 밤낮 없이 일했다. “공장이 있어 내 몸 또한 있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은 내 몸과 같고 함께 직장을 지킬 것” 이라는 일념으로 주인과 직원은 한 몸이라 생각하고 인화단결(人和團結)을 최우선으로 열심히 뛴 결과 1941년 3월 15일에 경도정휘공업유한회사(京都精輝工業有限會社)를 창립 사장(社長)이 되었다.
사업은 날로 성장하여 갔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1948년 5월 17일에는 경도중야염색주식회사(京都中좝染色株式會社)를, 1950년 2월 10일에 경도경미염색주식회사(京都京美染色株式會社)를 창설하여 기업의 기틀을 튼튼히 다졌다. 이때 조국(祖國)의 현실은 6.25동란으로 국민생활은 처참하였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1957년 드디어 조국으로 돌아올 것을 결심하고 고향 창녕(昌寧)으로 귀국하였다. 1964년 서울에 서울경미염직공업회사(京美染織工業會社)를 창립하고 1967년 서울경미실업주식회사(京美實業株式會社)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진출에 들어갔다. 어릴쩍에 같이 살던 일가친척들이 흩어져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창녕군 고암면에 일백여동(棟)의 후생주택을 지어 이들을 입주시키고 농지 8만여평을 구입하여 농사를 짓고 생활의 안정을 찾도록 하였다. 이곳이 창녕의 신손가장(新孫家莊)이다. 생활이 어려워 생각하기 힘들었던 숭조목종(崇祖睦宗)의 정신을 깨우치기 위하여 선조(先祖)의 묘소에 의물(儀物)을 세우고 환경을 정화하며 재실(齋室)을 보수(補修)하여 묘제에 오는 일가들이 재숙(齋宿)할 수 있게 하고 제답(祭畓)을 매입하여 선영봉사(先塋奉祀)에 만전을 기하였다. 빈곤(貧困)과 무지(無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는 배워야 한다는 절실한 현실을 인식하고 인재양성을 위햐여 중학교(中學校)9학급과 창녕종합고등학교(昌寧綜合高等學校) 34학급을 설립하여 도시의 일류 고등학교 못지 않은 시설로 교육의 불길을 지폈고 전국의 영재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주어 인재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1971년도에 공(公)의 공로를 인정하여 국가로부터 국민훈장(國民勳章) 모란장을 받았다.

-큰 별은 지고-

2002년 7월 8일 창녕군 고암면의 큰 별 중야(中좝) 손무상옹(孫戊尙翁)이 노환으로 94세를 일기로 하세(下世)하였다. 생전에 못다한 그 많은 할일들을 뒤로하고 훨훨 우리 곁을 떠나셨다.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한짐 짊어지고 열심히 사시면서 자신보다 이웃을 그리고 선조님들과 종족(宗族)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보살피시던 그 분이 이제 고요히 편안한 쉼터로 먼 길을 떠나셨다. 고인의 큰 발자취를 기리며 7월 12일 11시 고암면민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진 추도식에는 고암면민 유지들 그리고 군수님, 경찰서장님들 비롯하여 「전국 밀양손씨종친회 손양기 회장」등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속에 공(公)은 먼 길을 떠났다. 아- 고인의 위대한 발자취만이 우리들 가슴에 슬픔으로 남겨놓고··· 고이 가셨다.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中좝 孫戊尙先生 銅像記

中좝 孫戊尙先生은 그 天資가 英邁하시어 試練의 克服과 難局의 環境을 超越하심도 사람들이 따르지 못할 바로 幼年時에 父親을 여의고 가난과 孤獨의 深淵에 잠겼던 弱冠 二十에 玄海灘을 건너 日本에 몸을 던졌다. 爾後 삼십여년 동안 그 人間桎梏의 極을 넘고 글자 그대로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惡戰苦鬪의 連續이었다. 그 結晶으로 얻어진 財貨는 다름아닌 하늘은 스스로 돕는 者를 돕는다는 天理 그대로 이며 이 天意를 體得한 先生은 그에 順應함도 萬人이 받들어 스승으로 하여 百世에 길이할 즉 오늘날 價値觀의 顚倒와 利己의 漲溢로 擧世하여 弘益의 賢士를 待望함이 그지없음에 先生은 決然히 鄕土 高岩의 敎育文化事業을 爲하여 巨財를 들여 오늘의 繁榮을 이룩함에 그 基盤이 되었고 西紀 천구백칠십년에는 全私財를 學校法人 中좝學園을 세우고 이곳 高岩에 中學校와 綜合高等學校를 設立하여 地理的으로 不利한 與件과 많은 隘路를 오로지 先生의 意志와 熱誠으로서 克服하고 至今은 國內에서도 가장 優秀한 施設로서 그 빛은 온누리에 드리워지다. 오! 그 거룩하고 崇高한 先生의 뜻이여! 그 不朽의 功績이여! 實로 一世의 龜鑑이요 永遠히 꺼지지 않을 燈불이라 그리하오며 우리는 마음과 힘을 모아 님의 像을 세워 永遠히 기리나이다. 오! 님이시여 우린 쉬지않고 배우오리 님의 뜻을 높이 받들고
西紀 一九七六年 五月 二十日 建立
醫學博士 河斗澈撰
西峰 金思達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