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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승씨 질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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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손교영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4-11 23:24 조회1,5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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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신 내용을 늦게 보게되어 대단히 미안합니다
우선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요약하여 보내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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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씨(孫氏)의 비조(鼻祖) - 구례마(俱禮馬)
지금으로부터 약 2,100 여년전 삼한(三韓)시대 즉, 한반도 남쪽에는 경주(慶州)를 중심으로한 진한(辰韓), 서쪽에는 익산(益山)을 중심으로한 마한(馬韓)이 있었고, 동쪽에는 김해(金海)를 중심으로한 변한(弁韓)이 있었다. 이때에 진한 땅은 여섯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각 마을을 다스리는 촌장(村長)이 있어 이를 육촌장(六村長)이라 하였으니 이 육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모시고 신라국(新羅國)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서기 24년 신라 3대 유리왕(儒理王)이 즉위(卽位)하시고, 유리왕(儒理王) 9년 되던 해에 육촌(六村)마을을 육부(六部)로 고치고 육부촌장(六部村長)에게 각각 성씨(姓氏)를 하사(下賜)하셨다. 그때 서기 33년에 하사(下賜)하신 성씨(姓氏)가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 설(薛)씨의 여섯 성씨(姓氏)로서 우리 밀양(密陽) 손씨는 이때부터 손씨 성(姓)을 쓰게 된 것이다.(이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다), 삼국유사 원문에도 이와같이 우리 밀양(密陽)손씨는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9년, 서기33년에 손(孫)씨로 성(姓)을 하사(下賜)받아서 생겼으며, 후손인 손순(孫順)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2. 시조(始祖) -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
우리 손씨의 시조(始祖)이신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은 1950-60년대(年代)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도덕(道德) 교과서에 그 효행(孝行)을 게재하여 초등학교에서 공부했을 정도로 대효(大孝)이시다. 그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손순(孫順)은 아버지 손학산(孫鶴山)을 여의고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奉養)했는데, 어린 아들이 늙으신 어머니 운오(運烏)의 음식을 뺏어 먹는 것을 보고 아내에게 “아들은 다시 낳을수 있으나 어머니는 한번 죽으면 다시 모실 수가 없는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이 굶주리시니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니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겠소” 하며 아내와 의논을 해서 어린 아들을 취향산(醉鄕山) 으로 데리고 가서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돌로된 종(鐘)이 나왔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나무에 걸어 놓고 두들겨보니 소리가 은은 했다. 아내가 “이 종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福)인 듯 싶으니 이 아이를 묻으면 않되겠습니다” 하며 아들과 돌로 된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鐘)을 집의 대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소리가 대궐(大闕)까지 들려서 흥덕왕(興德王)이 “서쪽에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보통종이 아니니 조사해보라” 고 하자 신하(臣下)가 조사해 보고 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왕이 “옛날 한(漢)나라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솟(金釜)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孫順)이 아들을 묻자 땅에서 석종(石鐘)이 솟아 나왔으니 천세의 효(孝)와 후세의 효(孝)를 천지(天地)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 하고는 그 효행(孝行)에 감탄하여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쌀 50석을을 하사(下賜)하여 효성을 숭상(崇尙)했으며, 835년(흥덕왕 10년)에 월성군(月城君)에 봉했다. 이에 손순이 원래의 집을 희사(喜捨)하여 절을 만들어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돌 종을 모셔두었다. 그 후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때에 후백제(後百濟)의 침입으로 절과 종(鐘)은 없어지고 절터만 전해지고 있다.
위의 내용이 현재 우리 현대인(現代人)들에겐 다소 생각의 차이가 있겠으나 우리 밀양손씨 문효공(文孝公)하면 신라 대효(大孝)로서, 옛 집터에 지은 홍효사(弘孝寺)는 현재 경주시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되어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시제(時祭)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신라건국좌명공신(新羅建國左命功臣)인 육촌장(六村長)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하여, 1970년 경주(慶州)에 육촌장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을 건립하였으며 그 이름을 양산재(楊山齋)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매년 경주시(慶州市) 주관(主管)하에 음력 8월 17일을 향사일(享祀日)로 정하여 모시고 있으며, 또한 이곳은 광대한 묘역(墓域)으로서 현재 준성지(準聖地)로 되어있다. 이러한 우리 선조의 사적(事蹟)을 가슴에 담아둘 것이며 자부심을 갖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중시조(中始祖) 광리군(廣理君)
중시조(中始祖)이신 광리군(廣理君)의 휘(諱)는 긍훈(兢訓)이시다. 긍훈(兢訓) 즉 손대장군(孫大將軍)께서는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하는데 훈공(勳功)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킨 분이시다. 당시 국운(國運)이 기운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 견훤(甄萱)왕이 운문산(雲門山)에 지룡산성(地龍山城)을 쌓고 기습부대를 만들어 신라(新羅)공격을 노리던 중 서기 927년에 지룡산성(地龍山城)을 출발하여 간월산성(間月山城)의 신라군(新羅軍)을 무찌르고, 신라군을 포위(包圍)하여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과 왕비(王妃)를 죽이고 국권(國權)을 휘어잡은 후백제 견훤(甄萱)왕은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敬順王)을 허수아비로 왕위(王位)에 올려놓았다. 이에 손대장군은 송도 개성(開城)의 고려왕 왕건(王建)을 찾아가 후백제를 공격할 것을 간청해 왕건(王建)이 손대장군의 지휘하에 15,000명의 기마병(騎馬兵)을 주어 후백제군 토벌(討伐)에 나섰다. 손대장군은 당시 견훤왕을 몰아내고 왕에 올라있던 견훤의 아들 신검(神劒)을 생포하고 후백제군을 정복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고려가 마침내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어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지고 정일품(正一品)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니 그 명성이 일세에 떨치게 되었으며, 사후(死後) 밀양부북교동춘복동(密陽府北校洞春福洞)에 장례하고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追贈)하였다. 후세(後世)인이 손대장군의 공훈(功勳)과 명성(名聲)이 당대의 으뜸이었으나, 역사에 그 사적(史蹟)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추화산정(推火山頂)에 사당(祠堂)을 세워 관(官)으로부터 수물(需物)을 갖추어 향사(享祀) 하였다. 특히 광리군께서는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思想敎育)을 보위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4. 손(孫)씨 의 본관(本貫)
손(孫)씨는 본관(本貫)이 많지만 9본(本), 즉, 밀양(密陽), 경주(慶州), 일직(一直=安東), 평해(平海), 청주(淸州), 구례(求禮), 비안(比安), 나주(羅州), 부령(扶寧)손씨 등이 있다. 밀양손씨가 전체의 80% 이상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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