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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무사 (公平無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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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들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8-01 03:18 조회1,8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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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지치게 하는 년중 더위는 금년은 월복이라 말복(末伏)을 보름 앞두고 큰 장마없이 보낼것 같으나 어느 해오년 이던 언제나 큰장마 비는 태풍이 몰고 온다는 것을 주의해야 할것 입니다,

지난날 수차에 걸쳐 해외(海外)를 돌며 선진 문화국민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떠오르는 충무공 성웅 " 이순신 " 장군께서 말씀하신 " 나라가 가난하면 국민을 생각하게 되고 집안이 가난하면 아내를 생각하게 된다 " 고 말씀 하셨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문화생활(文化生活)의 지나온 모습은 어떠 하였는기를 생가하여 보며 아무리 생활이 변(變)하고 문명이 변화(變化)를 가져다주는 현실(現實) 이라 하여도 핵가족화 때문에 잃어만 가는것이 가족간에 사랑인것 같다,

지난날 도편수(都片首)로서 우리 민족의 생활에 안식처인 전통한옥(傳通韓屋)은 초가(草家) 집이던 기와(磯瓦) 집이던 가옥(家屋)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게 외형적(外形的) 기품이나 내부구조(內部構造)등 기후에 따라 선조님들에 기계와 혼(魂)이 담긴 가옥으로서 가정(家庭)을 꾸미며 살아가는 일상생활 사람의 삶에 갖추워야할 삼대 요소가 의식주(衣食住 = food, clothing, shelter) 라고 말합니다,

천연의 사계절(四季節) 환경의 계절적 기온에따라 먹는음식 입는의복 그리고 생활하는 주거공간(住居公間) 등을 말하는데 이중에서도 안식을 취하는 가옥에서는 속설(屬說)에 행복한 조건을 갖춘 살림집에는 세가지 소리가 들려야 행복한 가정이라 하였다,

행복한 가정의 세가지 소리란 그 첮째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야 하며 두번째로 다듬이 소리가 들려야 하며 세번째로 여인의 웃음 소리가 울타리를 넘어 들려야 함을 말합니다,

반대로 가세가 기우는집을 살펴보면 가옥의 울타리부터 부실하며 아녀자의 앞처마등 옷맵시가 지져분한 티를내며 울음소리와 한숨소리가 울타리를 넘어 지나가는 행객도 듣고 지난다고 하니 우리민족 가정의 경계를 뜻하는 울타리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주지 하시고 고대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때 위(魏)나라에서 진(晉)의 정권 교체기의 부폐한 정치권력(政治權力)에 등을 돌리고 죽림(竹林)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정담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선비를 죽림칠현(竹林七賢) 이라고 합니다,

칠현(七賢)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 산도(山濤 205 ~ 283), 왕윤(王戎 234 ~ 305), 유령(劉怜 221 ~ 300), 원적(院籍 210 ~ 263), 혜강(惠康 223 ~ 263), 향수(向秀, 227 ~ 272), 완함(阮咸 ? ~ ? ) " 등을 말하는데 이들 칠현은 서로 교류 하면서 일찍이 산양(山陽 하남성 수무) 죽림에 모여 위(魏)나라 말기 사마시의 일파가 국정을 장악 전황을 일삼자 이에 등을 도리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무의사상에 심취 하였던 지식인들 말한다,

고대중국 초한전(礎漢戰)의 礎나라 초패왕과 漢나라와의 전쟁을 보아도 하나의 국가의 운명이란 한나라의 충신(忠臣) 덕장(德將)이 천군만마(千軍萬馬)라는 고사와 같이 구구(求國)을 위하여 번영의 중요성을 말하며 이러한 속설처럼 국민 모두가 대동단결 하여야 된다는 것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도리(道理)와 순리(純理)라 생각된다,

진평(陳平)은 한(漢) 나라 초기의 명신(明臣)이다,
춘추 전국시대의 역사에 남을 충신으로서 진평(陳平 BC 288 ~ BC 178 )은 원래 漢나라 사람이지만 당대 지략이 뛰어난 모사(謨士)의 전략가로서 양무(하남성 원양) 라는곳 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때부터 황노학(黃老學)을 좋아 하였고 진(秦)나라 말기 진승과 오광(吳廣)이 붕기하자 위왕을 섬겼으나 중용(中用)되지 못하였다,

초(礎)나라의 초패왕 항우(項羽)에 기탁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어도 진평(陳平)을 뛰어난 전술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고조의 유방(劉邦)을 여섯번이나 위기에서 구해내고 " 여태후 " 가 유씨 왕조를 찬탈 했을때 주발과 함께 한실의 사직을 구(求)한 인물이다,

진평(陳平)의 능력은 항우(項羽)와의 전쟁때도 나타 났지만 차세의 빛을 더욱발했는데 사실 진평에게는 소화와 장량등 한신에 비하면 2 급 참모에 불과 하였지만 언제나 자신의 분수를 지켜 불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그런 성품 덕분에 한신과 같이 팽(烹)당 하지도 않았다,

처음엔 황우(項羽)의 진영에서 일하다가 망명해온 진평(陳平)이 유방(劉邦)의 수하로 들어오기를 청(請)하였을때 구설수중 " 형수를 간통했다, 뇌물을 좋아한다 " 고 하는등 온갖 참소가 끊이지 않아 유방(劉邦)은 진평(陳平)을 등용에 주져 했었다,

이에 " 장량 " 이 나섰는데 " 진평(陳平)의 능력은 헤아릴수 없습니다 그가 궁핍하여 저작거리에 계란몇게 취하였다고 한들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
" 주군께서 후(侯)에 만족 하시려면 그를 영빕하지 않으셔도 됨니다, 그러나 천하를 도모 하시려면 꼭 필요한 인제일 것입니다, " 하며 그의 등용을 권하였습니다,

漢나라의 초대 황제(皇帝)가된 유방(劉邦 BC 247 ~ BC 195 )은 진평(陳平)을 대면한 후 신임하며 호군중위(護軍中慰)로 임명 진(秦)나라 말기에 군사를 일으켜 항복을 받고 장장 4 년에 걸쳐 물고 물리는 항우(項羽)를 대폐 시키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것이 유방(劉邦)에게는 진평(陳平)이라는 장수가 있어서 통일에 꿈을 이루게 되였던 것이다,

유방(劉邦)은 거만한 사람 이였으나 한번 사람을 믿으면 의심 하지않고 일을 맡겼기 때문에 진평(陳平)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수 이었는데 " 진평 " 의 능력 가운데 으뜸은 " 분육(分育)' 이라는 고사로 유명한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솜씨를 말한다,

진평(陳平)이 지난날 고향의 서생으로 있을때 마을의 사제(社祭) ~ 토지지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었는데 제물로 올렸던 고기를 나누워 주는 재(宰)가 되자 고기를 나누워 주는 것이 매우 공평하여 마을 사람들간 분란이 없어지고 모두가 " 진평 " 을 칭찬 하였다고 합니다,

" 진평(陳平)을 천하의 재상으로 삼더라도 고기 나누듯 공평할 것인데,,,,," 라며 사람들은 탄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단순히 한마을에 제사에 고기를 나누워주는 고기에 분배를 넘어 천하의 복록의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워 주고자 하는 포브를 간직했던 진평(陳平)은 꿈꾸던대로 재상이 되여 한나라를 튼트난 반석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진평(陳平)은 유방(劉邦)을 섬긴후 여섯번이나 모사기계(謨士奇計)를 내놓고 볼록(奉錄)에 올랐다고 하며 " 진평 " 의 계책대로 유방(劉邦)의 군이 최대의 위기를 모면 하게 되였다,

" 진평 "의 뛰어난 지략의 모사(謨士)가 할우(項羽)와의 승패를 건 초한전에서 타고난 지모를 발휘하여 유방의 참모로 승리에 주역이 되였으며 BC 202 년 숙적 항우(項羽)릏 무리치거 정식으로 유방(劉邦)은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르게 되였고 덕장(德將) 진평(陳平)은 항나라의 기틀을 다진 명 재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 진평은 일찍이 도마위에 제육(祭肉)을 나눌때 그 포부는 우ㅓㄴ대 하였다, 그는늘 기이한 계책을 내어 복잡한 분규를 해결 하였고 국가의 환란을 제거 하였으며 여태후 때는 국가의 변고가 많았으나 진평은 스스로 화를 면했으며 나라의 종묘 사직을 안정시켜 영광스러운 명성을 유지하여 어진 재상으로 칭송이 자자 하였다,

이 어찌 시작과 끝이 다 좋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 라며 진평(陳平)이 성공한 것은 천하의 공평하게 하고자 한 성품과 대세를 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덕분에 한 주인을 만나 재주와 충성을 다 하였으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융통성을 발휘하여 적절한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 하였다 하여 진평(陳平)을 높게 평가 하였다,

유방(劉邦)이 죽고 혜제(惠帝)가 황제가 되였으나 단명하여 모후(母后)인 여후(呂后)가 실권을 장악하다 죽자 문제(文帝)가 여씨(呂氏) 가문을 타도하여 진평(陳平)에 의하여 유방(劉邦) 의 가문이 평정을 찾으니 재상으로서 소명을 다하다 명성을 날리니 BC 178 년 (文帝 2 년 ) 세상을 떠나니 文帝는 陳平에게 헌후(獻侯)라는 시효를 내렸으며 후일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을 하였다고 한다,

" 진평(陳平)은 마지막 고조의 막하에서 유신을 의탁하며 항상 뛰어난 계책응 짜내여 분규한 나라의 환난을 구하였으며 여후(呂后)시대는 다사다난 하였으나 진평(陳平의 스스로 활약으로 위난을 벗어나 한나라의 종묘사직을 편안케 하고 명예롭게 생을 맞쳐 지극히 어진 세상으로 찬양을 받았다 " 라고 사기(史記)에 기록되여 있습니다,,,,,,,,,^&^,




北部支會長 明泉公派 孫 秉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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