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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文化有産)과 동구능(東九陵),,,,(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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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들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5-09 06:30 조회1,6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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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 이라면 다 알고있는 민물 고기의 제왕(帝王) 야행성인 가물치 머리에는 흑점이 일곱개가 있는데 한여름 가믐으로 물이마른 연못의 가물치가 밤하늘에 떠있는 북두칠성에게 인사를 하면 아무리 불타는 칠년대한 가믐이라 하여도 장마가 시작 된다는 전설(傳說)이 있는데 막상 필을잡아 문화유산(文化有産)에 대한 글을 쓰자니 지난날 공직에 몸담았던 시절이 생각 남니다,

우리 민족은 조상을 찾아뵙는 일은 국속(國俗)에 설날(正朝)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년중 네번의 조상묘를 찾게 되는데 도편수(都片首)로서 육신(育身)의 사고가 있기전 전국을 돌며 사찰(寺察)이나 성씨별 문중사당(門衆史堂)을 건축 하던 한 사람으로 뒤늦게 우리 밀양손씨(密陽孫氏) 문중의 사적(史籍)이나 묘소(墓所) 찾아보며 풍수학적인 건물의 위치나 좌향등 많은 생각을 갖게 되였다,

지난날 공직에 몸담아 있던시절 문화재 전문교수님 들에 의하여 많은것을 알게 되였는데,,,,,
종묘(宗廟)의 공신단과 사직단 제례(祭禮) 모습을 참, 주관 하면서 남의 가문에 제사(祭祀)를 흠하지 말라고 하였드시 우리 문중의 제사 지내오는 풍습(風習)을 알게 되였습니다,

다른것은 몰라도 전통한옥(傳通韓屋) 도편수로서 우리 문중의 시조 문효사(文孝司)는 팔작 지붕의 겹초마형은 그런대로 구성(構成)하여 건축 되였다고 하나 입덕묘(立德廟)의 사당은 홑처마 맞배지붕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건물 좌우의 풍판(風板) 설치가 기본인데 설치가 않된것을 보면서 마음에 아쉬움과 허전함을 느겼습니다,

한양 도읍지를 경계로 남양주 구리시는 백두대간이 2천여리를 뻗어 오다가 철령이 꺽여 서쪽으로는 수백리 광주산맥으로 내려온 내룡(內龍)의 지세(地勢)가 좋을 뿐더러 풍수학상 훌룡한 명당이 빛어놓아 고을마다 명당 자리가 많아 왕릉(王陵)과 사대부의 묘(墓)가 많으며 우리민족의 풍습(風習)의 문화유산(文化有産)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 합니다,

문화유산(文化有産) 이란 내국적(內國的) 민족 문화유산과 세계적인 평가에 의하여 정(定)한 문화유산이 있는데 구리시에 있는 세계적인 문화 유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스페인 세비아 컨벤션 쎈타에서 열린 제 33 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조선시대 왕릉군(王陵郡) 인 동구릉(東九陵 = Royel tombs of the jdseon dynasty) 을 세계문화유산(Worild cuitural heritage) 으로 2010 년 등재 확정(確定)되였다,

세계유산문화 보고서 ICOMOS 는 " 조선왕릉이 유교(儒敎)의 문화 영향아래 중요한 장례의식(葬禮儀式)의 전통과 풍습적인 풍수사상(風水思想)을 간직하고 고건축(古建築)과 풍치의 경관등 동아시아의 무덤과 건축 발전에 중요한 단계를 보여 주웠으며 나아가 한민족적 전통으로 지금도 왕릉제례(王陵祭禮)나 가문마다 선조의 묘제(墓祭)를 시향제(時享祭)라 하여 시제(時祭)등 제례(祭禮)의 풍습(風習)이 있어 " 등재권고 " 평가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현제 우리 농악(農樂)도 유네스코 무형유산 위원회 심사보존 기구에서 만장일치로 " 등재권고 " 의견을 받았다고 하며 강릉농악(江陵農樂)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농악도 등재 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산은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1995 년 등록됨) 경주 보문단지, 역사적 유적보존지구,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2000년 등록) 에 이여 제주의 화산성, 용암동굴(2007 년 등록) 조선왕릉을 포함 인류의 지취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유산(cuitural heritage) 등 9 건이나 등재 되였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유교사상(儒敎思想)에서 비롯된 장례문화(葬禮文化)는 삼국시대 때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묘호(墓好)의 명칭을 묘(廟), 단(壇), 릉(陵), 원園), 묘(墓) 등으로 조상을 모시는데 있어야할 릉(陵)상은 2 廟, 1 壇, 143 陵 9 園, 이 있어야 하나 유실과 훼손으로 현존하고 있는 남북한(南北韓) 의 陵은 50 기가 있다고 한다,

이중 북한에 10 기(함흥 8 기, 개성 2 기) 남한에 40 기중 동구릉에 왕과 왕비의 유택으로 9 기가 있어 왕릉군(王陵郡)을 이루고 있는데 풍수학상 유택에 제일이라 하여 1408 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太祖)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太宗) 이방원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의 묘(描)자리를 물색 하였다,

묘자리를 정(定)하지 못하였으나 이미 태조와 무학대사가 자신의 유택으로 정한곳이 현재의 구리시 인창동 산 2ㅡ1 번지 57 만 9,557 평에 조선시대 능침이 시작되여 구지(龜旨)라는 지명도 얻게 되였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를 시작으로 마지막 순종에 이르기 까지 27 기의 왕위를 계승 하였는데 왕이 등극하고 승하 할때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헤아릴수 없이 많지만 조선 오백년 역사를 크게 세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첮째는 피(血)의 값으로 조선을 건국 하였으며 둘째는 왕의 계승을 장자 상속의 원칙 셋째는 혁혁한 개혁의 공로가 있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으로 볼수 있는데 이 세가지가 시대적 어려운 문제를 않고 있었던 왕은 태조, 문종, 선조, 현종, 영조를 말합니다,

이들은 등극에서 재위기간 내내 죽음을 맞게 될때까지 세가지 조건이 맞물려 있던 왕들이며 또 공통점은 모두가 동구릉에 묻혀 있다는 것이며 필자의 소견으로는 인문 환경적 풍수지리로 볼때 용(龍)의 머리가 백두산(白頭山)에 닿았고 근조산은 백운산 주산은 검악산이 되며 조산(祖山)과 안산(案山)의 형태가 특별 하므로 일월상포형(日月相抱形) 입니다,

풍수사들에 따라서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으로 보기도 하고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으로 보기도 하는데 사찰(寺察)를 건축하면서 기회가 되면 스님들께 어께 넘어로 알게된 풍수지리의 원문에 이해를 차후 시간이 주워지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홉기의 동구릉(東九陵) 유택은 건원릉(建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綬陵), 경릉(景陵)등 유택으로 있으며 여러 학자님이나 시민들이 동구릉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하고 사진을 올리며 책자를 펴내니 좋은 일이라 생각됨니다,

태조 이성계는 어떤 사람인가 ?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 변방 무인으로 고려국(高麗國) 신하로서 고려의 왕들을 위하여 수년간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빈 장수였다, 고려 31 대 충숙왕 둘째 이들로 태어난 공민왕은 원나라의 배척 운동을 벌리고 변방 호법등 몽골풍을 폐지한 임금으로서 그의 말로는 비참 하였다.

왕비 보탑실리 공주가 죽은뒤 " 신돈(申敦) " 에게 맡긴뒤 홍륜(洪倫)이 익비를 범하여 임신 시키자 이를 은폐시키려 " 홍륜과 최만생 " 을 죽이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살해(殺害)되였다,

공민왕은 이성계를 신뢰 하였고 전투가 있을때 마다 승리를 부탁 하였으나 문란해진 고려(高麗)를 더이상 볼수 없었^는데 " 우왕과 최영 " 으로 부터 요동정벌을 이성계는 네가지 불가론을 주장 하였다,

첮째는 작은 나라가 큰나라에 거슬리는 일이 옳지않고 둘째는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사의 이동은 부적당 하며 셋째는 요동 진격을 틈타 남(南)으로 왜구의 침범할 우려가 있고 넷째는 무더운 우기(雨期)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수가 없으며 여름철 전염병 등을 말하였다,

좌군 통도사 " 조민수 " 와 함께 위화도에서 5 만 군사를 회군(回軍)한 이성계는 정적(政適)인 최영과 우왕을 살해(殺害)하고 결국 고려 왕조를 뒤엎고 1393 년 조선(朝鮮)을 건국 하였으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정사(政事)와 왕업(王業)을 잇기 위하여 유교(儒敎)를 국시(國是)로 삼았다,

조선시대 릉(陵)의 배경은 풍수의 기본인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이루고 남쪽 (묘(墓)의 전면) 으로는 안산(案山)이 바라 보이는 풍수학상 위치를 정(定)하는 것이 일반적 아다,

왕릉(王陵) 입구에는 홍전문(紅箭門 ㅡ 홍살문 이라하여 영혼이 출입하는 문) 이 서있고 마음에 악귀가 건너지 못한다는 금천교(錦川橋)라 하여 돌로 만든 교량(橋樑)을 지나는데 고궁과 능침에 설치함은 뜻이 있으며 금천교를 지나서 정자각(亭字閣) 제실(祭室) 비각등 능침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 조상의 묘도 형태는 다음과 같다,
* 능상 ㅡ 묘의 봉분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병풍석과 난간 주변에봉분 하단에 두르는 것을 말하며 이를 봉분(封墳) 이라고도 한다,

* 곡장(曲墻) ㅡ 묘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東, 西, 北 삼면을 둘러놓은 담장을 말하며 일반인의 묘(墓)에는 사성 이라고도 합니다,

* 석호(石虎) 석양(石羊) ㅡ 릉(陵)을 수호하기 위하여 악의 무리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돌로 만든 호랑이(虎)와 양(羊)을 말합니다,

릉(陵)상의 기물은 이 외에도 망주석(望柱石 ㅡ 초대석 이라고도 함),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ㅡ 좌우쌍봉), 배석(正中石), 예감(裔坎), 신교(神攪)와 신도(神道), 표석(標石), 비각(碑閣), 소전대(燒錢臺 ㅡ 축문을 태우는곳), 정자각(亭字閣 ㅡ 제사를 모시는 건물),,,,,,

통례적인 기물(棋物) 배치도는 양(石羊)과 호랑이(石虎)는 엇바꿔 밖을 향하여 배치하며 앞서 말씀 드린대로 릉(陵)을 수호한다는 뜻이 있으며 석상 앞에는 장명등(長明燈) 등 좌우로 한층 낮은곳에 문, 무인석, 양주석, 등을 세우며 그 뒷편에 석마(石馬)등을 배치하는 것이 왕릉(王陵)에 일반적인 기물이다,

릉침은 시대에 따라 약간에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그 꾸밈은 같으며 대왕(大王)과 황제(皇帝)의 능침에는 건물이나 석물의 배치와 기물의 종류도 많은 차이가 있으며 이렇게 왕릉에는 풍수지리설의 음양오행에 의하여 릉(陵)을 보호하는 주산을 뒤로 두고 그 중턱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유택을 정하는 것이 풍수역경(風水易經)에 기본으로 되여 있습니다,,,,,,,,,,,,,,^&^,


北部支會長 明泉公波 孫 秉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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