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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梨花)의 다정가(多情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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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들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4-23 14:19 조회2,1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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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남양주에 있는 추억이 담긴 시골집을 들리면서,,,,,,,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탐욕속에 살아 가면서도 탐욕(貪慾)이 없는 것처럼 자신의 삶이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모든 사람들은 탐욕속에 밤낮을 모르고 살아도 자기 혼자만은 탐욕 속에서 멀리 벗어 나기를 바라고 있다,

오동지 섣달 설한풍(雪寒風)에 동백꽃을 시작으로 후박, 매화,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순서로 이화(梨花)가 만발하여 봄의 향기를 노래하며 맞이 하는데 아랫도리 감자에서 풍경 소리가 울리도록 찾아 다녀도 세월을 막지 못하며 자연이 주는대로 살아 가는것이 인생 이라고 한다,

고온 다습한 날씨 관계로 평년 보다도 일주일 이나 빠른 개화(開花)로 배꽃이나 복사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이렇듯 계절(季節)의 변화(變化)를 자연의 섬리라고 말합니다,

자연의 재앙(災殃)이나 기후(氣候)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대항치 못하는 것이 사실이나 자연의 변화속에 피는 꽃은 곧 과실(果實)을 맺는데 뒤늦게 개화(開花)하여 제일먼저 먹는 과일이 대추라고 하며 사람들은 제사(祭祀) 상차림에 대추를 제일의 과일로 놓습니다,

우리고장 남양주는 인구 팽창으로 현대 사회의 문교정책(文敎政策 education policy), 모든 행정(行政 administion), 체계 (體係 systematic), 가 개편(開編 reorganization), 되였으며 진정한 흙 냄새와 사람 냄새가 나는 곳으로 예전부터 양주(楊州)라 하면 그 역사가 고인돌이 세원부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의 생활이 석기시대 이전부터 역사를 이여온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지역의 특산물(特産物)인 먹골배의 산실인 양주골은 지금에 노원구, 망우리, 남양주, 구리 등을 말하며 중랑천 상수인 한내천(한천 = 한내개울) 묵동리를 경계로 조선 시대때에는 망우면 묵동리 였으나 1914 년 양주군 구리면으로 또다시 양주군 노해면으로 개편 되였다가 1963 년 서울시로 편입 되였다,

조선시대 문방사우(文房四友 = 종이, 붓, 먹, 벼루) 로 잘알려진 먹(墨)은 남양주 진건의 먹골부락과 공능리 묵동(墨洞)에서 제조 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망우동을 비롯하여 노해면 이였던 상계, 중계, 하계동은 남양주 구리의 일원 이였습니다,

아무리 지역개발(地域開發)이 되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이지역은 옛날의 명성을 이으려는 듯 현대 생활의 개발에도 봄이면 배꽃(梨花)이 군락을 이루며 활짝피여 장관을 이루는데 일제때 일본인들이 중랑천 바닥의 은빛 백사(白沙)를 보며 모래썩인 토양(사질토)이 통풍(通風)이 잘되는 양주지역의 특성을 이용 배나무(新品種)을 들여와 재배 하면서 명소가 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무근 이다,

역사적으로 어린 단종(端宗)이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하여 영월로 유배를 갈떼 금부도사(禁府都事 鍾 5 品) 왕방연(王邦衍)이 단종을 호송 하면서 단종의 영월 귀향 행차는 십리를 가서 한번 쉬어 갔다고 하는데 중랑천을 지나 묵동에 있는 송계원에 머므르며 강행군을 하면서 주군에게 물한목음 먹지 못하고 망우리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어린 임금에게 물(水) 한목음 주지 말라는 엄명을 지켜야 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귀양행차는 온갖 시름을 없애 준다는 망우리 고개를 넘어 갈때도 쉬어가지 않았다고 하며 가문의 영광인 금부도사(禁府都事) 직책(職策)이 추악하고 원망 스러웠다고 전(傳)해지고 있으며 장님도 되고 벙어리도 되고 개(犬)처럼 충성 해야 되는 자신을 원망 하였다고 한다,

주군이 목이타니 우물물 물 한목음 달라고 하였으나 어명이라 드릴수 없다고 하니 어린 단종이 쓰러 지기라도 할까바 마음은 답답하고 애가 타지만 왕방연(王邦衍)은 단종(端宗)의 청(請)을 들어 줄수가 없었다,

햇빛이 내리 쬐는 길가의 배나무를 바라 보면서 저 배가 익어 수확할때 쯤이면 이길을 다시 돌아올수 있을지 어린 단종(端宗)은 중얼거리며 듣고도 못들은 것처럼 왕방연(王邦衍)은 흙 먼지를 날리며 유배의 길을 재촉 하였다,

삼복 더위에 끌려가는 단종(端宗) 이나 끌고가는 왕방연(王邦衍)도 고생은 말로다 못 하였으며 침이 마르고 온몸에 피기 마르는 아품이 밀려 왔으며 갖은 고생을 하며 단종(端宗)은 영월 청령포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게 되였다고 합니다,

소임을 마친 왕방연은 단종(端宗)의 옥체만안(玉體萬安) 하기를 마음 속으로 빌면서 영월을 떠나 귀경(歸慶) 길에서 어린 임금을 홀로두고 가는 마음은 괴롭고 울적 했으며 그는 평창강 나룻터에 이르러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며 애끊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시(詩) 한수 읊었다고 합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아으니
저 물도 내 맘 같아야 울어 밤길 애놋다,

( 천만리나 되는 멀고먼 길에서 고운님(단종)과 이별을 하고
내 마음 둘곳 없어서 냇가에 앉아더니
저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을 홀로 가는 구나,,,,,,)

봉화산(烽火山)은 남산 봉화대(烽火隊)에서 이여지는 통신 수단으로 봉화의 연결 코스로서 제일봉화 가운데 가봉의 하나로 단종(端宗)을 영월까지 호송했던 왕방연(王邦衍)이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와 스스로 관직을 사임한뒤 봉화산 아래 중랑천(中凉川) 가에서 노후(老後)를 침거(寢居)하며 생(生)을 마쳐다고 한다,

왕방연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필목을 벗삼아 한그루를 키웠던 것이 먹골배의 근원이 되였다는 속설(屬說)로 전(傳)해지고 있으며 이 지역의 특산물(特産物)이 된 먹골배는 독특한 단맛으로 못 사람들에 사랑을 받게 되였다,

당도(糖度)가 높아 배가 익을 무렵이면 비료대신 설탕을 뿌려 준다는 소문이 나돌만큼 유명 하였는데 전북 나주배나 경기 성환 배등 그 어느곳에서 가꾼 배보다 수분이나 당도등 맛에 걸맛는 진미(眞味)를 자랑 할만 하다고 한다,

평생을 한(恨)스럽게 살아 가야만 했던 왕방연(王邦衍)의 마음은 바람결에 나부끼는 배 꽃잎들이 단종(端宗)의 넋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주군이 승하한 기일에는 자신이 가꾼 배한바구니를 놓고 영월 하늘을 향하여 속죄하는 마음으로 충신(忠臣)으로서 예(禮)를 올렸다고 전해지며 진정한 불사이군(不死二君)의 충신(忠臣) 으로서 후세인(後世人)들에 예의 근본이며 시대에 태어난 인물 입니다,

유배온지 1 년여 지난 1457 년 10 월 단종은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데 뻐꾹새가 울었다,

뻐꾹아 뻐꾹아 산마루에 울고가는 뻐꾹아
초(礎) 나라가 망한지 어제 오늘이 아닌데
너는 혼(魂)이 되여 숲속을 헤메이느냐
뻐꾹 뻐꾹 뻐꾹새야
산 송장이된 나의 혼(魂)도 실어다 주렴
구름처럼 솟아있는 저 산 넘어로 실어다 주렴,,,,,,

단종(段宗)에게 내릴 사약을 들고 행차 하였던 왕방연(王邦衍)은 차마 사약을 드릴수 없어 머뭇 거리는 사이 교활한 활줄에 목졸리는 주군(主君)의 죽엄을 보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사를 달래며 청룡포 나룻터에 앉아 읊던 시(詩)가 아닌가 ?

청령포는 동서로 길이 막히고 남쪽은 천길에 절벽이고 마치 창살없는 감옥과 같은 곳으로
1456 년 6 월 여름 장마로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여 잠시 영월부로 처소(處所)를 옮기여 루각(樓閣)에서 시(詩) 한수를 읊으며 세월을 보내다 그 다음해인 1457 년 10 월에 사약(死藥)을 받고 승하 하였다,

한강의 시발(始發)은 정선과 평창에서 흘러 내리는 동강(東江)과 서강(西江) 은 남한강(南漢江) 상류의 물줄기로 영월에서 만나 어라연을 지나 서강을 따라가는 길은 단종 애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지금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단종의 복원을 위하여 금성대군과 집현전 박사였던 " 이보흠 " 과 우리 밀양손씨(密陽孫氏) 문중의 " 손서륜 " 집현전 박사이신 선조님은 물론 사육신 생육신등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을 까요 ?

당대에서는 난신(亂伸) 이였으나 후대에 와서는 충신(忠臣)으로 만민으로부터 칭송을 받지 않던가요 ? 지금의 남양주를 거쳐 영월로 유배된 정순왕후(定順王后, 여산송씨)는 의덕대비(懿德大妃)로 있다가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됨에 따라 귀인(貴人)으로 궐 밖에 나가살게 되였다,

수(壽)를 다하여 남양주 진건(眞乾)의 송림(松林)에 모셨다가 숙종조에 복원이 되여 능(陵)으로 승격 되였고 정순왕후(定順王后)로 봉(奉)하여 사능(思陵) 이라고 명(名) 하였는데 능(陵)주변 소나무 원목 이나 가지가 영월쪽으로 뻗어 있어 단종을 사모하는 넋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대화 물결이 요동치며 산하를 마음대로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땅을 마음대로 파 헤쳐지고 있지만 아직은 그래도 배밭이 많이 남아있어 시골다운 고즈넉한 풍경(風景)의 도시로서 실로 감개가 무량 합니다,

고려시대 명신 절창 이조년(李兆年)은 그의 시(詩) 다정가(多情假)에서 이화(梨花)를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습니다,

"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려마는
다정도 병인가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

(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은 훤히 비추고
은하수는 들려서 자정을 알리는 때에
배꽃 한가지에 어린날의 정서를
자규(두견새)가 알고 저리 우는가 알까마는
다정 다감한 나는 그것이 병인양 잠들지 못 하였노라,,,,,)

이조년(李兆年)은 고려 충혜왕 때의 대제학을 지낸 충신으로 문인으로 배꽃과 달빛이 서로 희롱함을 나타낸 다정가(多情歌)는 문학성(文學性)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착하고 어린 단종(端宗),,,,,
주군(端宗)을 향한 왕방연(王邦衍)의 애뜻한 정(情)이나 이조년(李兆年)의 애상이나 순백의 향기를 자랑하는 배꽃 때문에 생긴 인정(仁程)이요 감정(感程)인데 지난날 청량리 주변의 중랑천, 한내천, 떡장거리, 구름다리, 경춘, 붉은당 휘계원의 옛고장 명성마져 점점 사라지니 언제까지 이여질지 모르겠으나 아쉽기만 합니다,

이화에 월백하고,,,,,
성인의 말씀중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씀과 같이 사람이란 누구나 얼굴은 있으나 사람으로서 도리(道理)를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제라도 우리 문중은 서로가 수어지교(水魚之橋) 관계이니 허물없이 지내는 마역지우(馬驛之友) 관계가 되여 인자와 인정이 넘치는 종친회가 되였으면 합니다,

고고한 중천의 하늘에는 은하철도가 놓여 있으니 돌아오는 춘삼월 계절은 언제나 이화가 만발하여 청록을 자랑하는 이화일지춘대우(梨花一枝春帶雨)라 하였나요 ? 현대화 개발로 배꽃이 만발한 먹골배의 전통이 언제까지 이여갈지 모르겠으나 잊혀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며 마음의 순결과 순수의 추억(追憶)을 만들어 가는 우리 문중이 되였으면 합니다,,,,,,,,,,,^&^,


北部支會長 明泉公波 孫 秉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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