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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亂世)의 충신(忠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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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들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4-08 12:01 조회1,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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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淸明) 한식(寒食)을 맞아 기온은 높아만 가는데 한여름을 준비 하려는 지기(地氣)의 힘을 빌어 한해의 녹음을 장식 하려는듯 나무 가지에는 눈망울이 터지려 하는데 인간에 능력으로는 막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는 자연의 지배를 받아가며 순리에 의해 살아 가야만 하는 인생사 인가 합니다,

년중 삼월이면 산악회(山岳會)에서는 시산제(始山祭)를 행하고 사월이년 낚시 모임에는 시조회(始釣會)를 갖는데 병상생활로 어려움을 격은 지금은 옛추억만 머리에 잠기여 지난날 춘절(春節)을 맞이하여 전남 고흥 녹동항에서 배를타고 거문도에서 때를 만난 갈치낚시 재미와 함께한 친우 조사(釣士)님들과 갈치회로 주(酒)님을 축배하던 추억의 시절이 생각 남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내 생각과 다르고 오가는 대화의 뜻이 다르면 우스게 소리로 "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강아지 풀뜨더 먹는 소리, 조랑말 방귀 끼는 소리, 개미가 쇠 깍아먹는 소리 " 라며 이야기의 사정을 부정 하거나 듣기를 싫어하며 또 아예 믿기는 커녕 생각도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이란 뜻 보다도 생각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명신보감(明心寶監)에 이르기를 위선자(爲善者)는 천보지이복(天報之以福) 과 위선자(爲善者)는 천보지위화(天報之爲禍) 라고 첫 문장에 말씀 하였는데 이뜻이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에서도 복(福)을 내리며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재앙(災殃)을 준다는 이야기 이거늘 사람들 생각에 먼저 보이는 것은 보지(報之)라는 어원 입니다,

어느 건물 이층 주(酒)님의 집이라 하였던가 ?
외상사절(外上謝節) 이라고 쓰여 있기에 이 문구(文口)를 보니 외인(外人)은 이층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뜻이 였으며 어느 사찰(寺察)의 스님이 후학에 이르기를 自知면 萬知고 補知면 早知 하라고 하였는데 이뜻은 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게 깨우치고 서로 도와서 알려고 하면 일찍 깨우 친다는 협력의 뜻을 말씀한 것인데 한문의 뜻글보다 우리의 소리글이 얼마나 아름답고 듣기가 편합니까 ?,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같은 말을 하여도 시각(示覺)으로 보기와 다른 뜻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느끼는 방법도 그러 하리라 보며 음양(陰陽)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며 이는 역(易)을 말하며 남자는 양(陽) 으로 여자는 음(陰)으로 본다는 것이며 모든 사물에 이치가 음얀(陰陽)에서 시작 된다고 합니다,

남성은 천(天)이라 하여 하늘에 태양에 의하여 건강 하고 용맹 스럽게 태어나고 여성을 땅(地) 라 하여 토양(土養)의 근원 으로서 오곡 백과를 생산하는 기능이 있어 남여의 염색체의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어도 음양에서는 합의(合義)에 이치를 이야기 합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 남여정 천지지대의야 (男女正 天地之大義也) " 란 말씀은 " 남여가 곧고 바르면 천지의 대의 이다 " 라고 하셨는데 다시말해 남자나 여자나 각기 다른 남성으로서 지위를 바르게 지키고 여성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서로가 협력하여 가는것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는것이 가장 위대한 도라고 합니다,

인생에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목적을 달성 하기까지 온갖 고난의 역경의 고통을 거쳐야 하듯이 마치 산악인이 산(山) 정상까지 온갖 고난의 역경을 포기하지 않고 끊기와 노력하는 자(者)에게 정상이라는 자리를 내어 준다고 한다,

주지하시고 동서고금을 통하여 과거나 현제나 개국(開國)은 대체로 역사적 혼란기에 정권(政權)이 교체되며 언제나 혁명에는 피(血)의 값을 치루어야 혁명이 성공 한다고 보는데 우리 민족의 역사 하나를 보아도 고려말(高麗末)에 혼란중 이성계의 역성 혁명으로 이여졌습니다,

고려말 정중부의 무신정변으로 시작된 무신정권은 최충우, 최우 등 60 여년 정사의 지속과 그 와중에 농민과 천민에 난괴 구문세력(權門世力)과 신흥 사대부의 대립이 격하 될 쯔음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밖이 실로 혼란의 극치를 이르게 되였습니다,

결곡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정점으로 470 여년 고려국(高麗國)의 파라만장한 역사를 마김하게 될때 포은 정몽주 (1377 ㅡ 1392 ), 본관 영일, 영천 태생으로 온건 개혁파의 신흥 사대부 영수(領首)로서 공민왕 9 년 (1360 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재원으로서 1362 년 예문관 검열 수찬으로 관직(官職)에 진출 하였다,

1380 년 정몽주 는 조전 원수로 이성계를 도와 전라도 운봉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하였고 이성계의 위화도 군(軍)을 지지하여 당시 우왕을 축출하고 공민왕을 지지한 공로로 익양군에 이여 충의군(忠義君)에 봉군(奉君) 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 이색 " 의 문화생 이였는데 정도전이 스승인 이색의 강한 반감을 느끼며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으나 정도전의 결정적인 겄은 이성계를 주측으로 새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 정몽주와 뜻을 같이 할수 없게되지 이성계와는 정적(政適)이 되였읍니다,,

공양왕은 정몽주라는 우군을 맞게 되여 역성 혁명파에게 총 공세를 하니 정몽주를 포섭하려 하였으나 여기서 단심가를 읊게 되였다고 합니다,

고려의 왕실의 존석을 주장한 충신들은 혁명 주체자들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하려는 음모를 알고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말(馬)에서 낙마하여 환중(患中)의 이성계를 정몽주가 문병하고 돌아 가던중 아들 이방원의 사주를 받아 방문객인 조영규 등에게 철퇴를 맞고 선죽교 다리 위에서 살해 되였다,

고려 충신 정몽주는 이방원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방원(李芳遠)이 혁명 주체에 대하여 정몽주를 떠 보려던 마음의 시문(詩文) 을 보냈는데,,,,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해로 누리리라 "

이에 대하여 고려충신(高麗忠臣) 정몽주가 답시(答詩)로 말하기를,,,,

차신사료사료(此身死了死了) 일백번갱사료(一百番更死了)
백골위점토 ( 白骨爲岾土 ) 혼백유야무 ( 魂魄有也無 )
향주일편단심(向主一片丹心) 영유개리여지(寧有改理與之)

"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야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변할리 있으리오 "

이렇게 단심가(丹心歌)로 이여져 화답(話答)하니 결국은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비참한 생(生)을 마감 하였습니다,

이성계가 위독 하다는 소문을 뒤엎고 개경으로 돌아오자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문병을 핑계로 찾아온 것인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물이 바로 이방원 이며 정몽주의 죽음은 고려국(高麗國)의 죽음과 마찬가자 이며 정몽주는 긴박한 상황의 수장으로서 적진을 방문 한것이 실수 였습니다,

선죽교는 북한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교량(橋量)으로서 길이 8,35 m 넓이 3,36 m 이 화강석 으로 1216 년 이전에 다리를 놓을 때는 선지교 라고 불렀다고 하며 정몽주 살해 이후 충절(忠節) 을 뜻하는 대나무가 돋아 선죽교라 불리게 도였으며 전설(傳說)에 선죽교 돌바닥에 붉은 흔적이 살해당시 정몽주가 흘린 혈흔이라 전(傳)해 왔지만 실제는 철(鐵) 성분에 산화 흔적에 불과 하다고 한다,

북한(北韓) 국보유물(國寶有物) 159 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으며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가 있다고 하며 선죽교와 도로를 사아에 두고 마주해 있는 거북이에 새겨진 돌비석으로 이곳에 와서 기원을 하면 자식을 낳을수 있다는 전설이 개성 사람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을 개국할 당시 지금처럼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면서 사회적 개혁을 주장하는 충신 정몽주 파와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자는 혁명주체(革明主體) 세력의 역신 이방원 파의 대립을 하는데 뛰어난 정치기로서 정몽주와 혁명주체 이방원 사이에는 결코 넘을수 없는 도리(道理)와 이해하기 어려운 극단적(極團的)사고의 간극(間極)이 너무나크고 엄연히 존재 하였던 것 입니다,

결국 두사람 사이에는 크나큰 상처를 입고 후세잉들이 지나간 역사를 선악(善惡)의 명제(命制)로 존재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일편단심(一片團心)이나 퇴폐(退廢)한 국가정사(國家政史)로 인한 한 시대의 역성혁명 주체나 결국 모두가 낙양성 심리허로 사라지니 인생무사요 삶의 회의라 하더니 모든것이 후손에 의하여 심판 결정되였다 하겠습니다,

이방원의 폐륜적 행동을 보다못한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둘째 아들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나버린 뒤 이방원이 정종의 건강을 이유로 왕위를 계승하여 이버지를 모시려 사신을 보냈으나 얼마나 화가 났으면 찾아간 사람마다 죽이거나 가두워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기에 함흥차사(咸興差使)란 고사가 생겼으며 개국공신이며 당대 영의정 이였던 남재(南在)가 사냔을 미끼로 모사(募士)에- 속아 귀경길에 이르게 되였다,

당적(黨適)이란 같지 않다고 하여 윤리에 지엄한 스승을 교살하고 권력을 위해 형제를 죽이기 까지 하는 살인마를 보면 그러한 폐륜이 도리(道理)상 그어디에 있으며 조선 시대의 권력을 위한 살인마 태종 이방원을 비롯하여 세조인 수양대군 연산군에 이르기 까지 성현의 왕이 아닌 살인마로 민족의 역사에 지울수 없는 과오적 상처라고 생갓 합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하면서 잔재의 감정등 태종 이방원이 태상박사로 임명 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고려의 충신 길재(吉再 1353 ㅡ 1419 )의 후학의 선비들이 사상감정(思想感情)으로 생육신등 수양이 어린 단종을 모라내고 정권 찬탈등 등을 돌리며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정당파등 사색 당파가 생겨나게 되였고 이때부터 당파가 전게되기 시작 하였다고 합니다,,,,,,,,,,,,,,,,,^&^,


北部支會長 明泉公波 孫 秉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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