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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女人天下) 왕소군(王昭君),,,,,(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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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들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4-03 00:20 조회2,1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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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끝은 하늘이고 마음에 끝은 정신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지난해 병상 생활과 유통 기관이 지난 몸이라 조그만 일을 하여도 마음과 가슴은 다급하여 쿵꽝 거리며 놀라움을 자주하게 되는데,,,,,,,,

한(漢) 나라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 한다는 조서(調書) 내려져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여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때에 왕소군(王昭軍)도 18 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後宮)으로 선발 되였는데 황제(皇帝)는 수천명에 이르는 궁녀들에 신상을 일일이 파악 할수 없어서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에게 한사람 한사람 모두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바치게 하였다,

그래서 부귀(富貴)한 집안의 출신이나 장안(長安)에 후원사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畵工)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쳐으나 오직 왕소군(王昭君) 만은 집안이 빈천(貧賤) 하기에 후원자도 없는데다 자존심이 강한 왕소군은 자신의 용모를 황제(皇帝)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는 자신에게 뇌물을 바차지 않은 왕소군(王昭君)을 쾌심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위에 아주 큰점을 하나 찍어 버렸는데 그후 원제(元帝)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보았으나 추(醜) 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王昭君)은 입궁한지 5 년이 흘러 갔지만 여전히 황제(皇帝)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궁녀(宮女)의 신분으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흉노(匈奴)의 족장 선우(嬋于) 호한야(呼韓牙)가 한(漢)나라 원제(元帝)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아(呼韓牙)는 모피와 준마등 많은 공물(供物)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元帝)에게 매우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는데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元帝)는 성대한 연애를 베풀어 호한야(呼韓阿)를 환대하자 호한아는 엉뚱하게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것을 청하였다,

황제의 딸중 공주 하나를 자신의 왕비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 하였으나 거절 하기에는 흉노의 세력이 너무 위협적 이였고 받아 들이자니 황실에 피를 받은 귀한 공주를 오랑케에게 시집 보내는 것이 가숨이 아팠지만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원제(元帝)는 그의 제안을 기꺼히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 보내기 전에 먼저 흉노(匈奴) 족장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번 과시 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황제의 후궁중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보지못한 궁녀들만 불러 화려(華麗)하게 큰 주연(酒筵)을 베풀게 하였는데 왕소군(王昭君)을 비롯하여 많은 궁녀들은 5 년이란 세월은 흘러 갔지만 지금까지 황제에 얼굴한번 보지못한 궁녀들은 이번 연회의 중요성을 알고 이번 기회에 황제의 주목을 받을수 있는 기회인지라,,,,,

궁녀들간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간에 앞을 다투워 황제(皇帝)의 눈길을 사로 잡기 위하여 자신의 몸매를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리운체 최대한 노출시켜 제각기 화려한 의상을 하고 색시하고 요염한 자태로 꽃단장 하고 연회(宴會)장 으로 등장 하였다,

궁녀들이 각양각색으로 치장을 하고 선녀와 같이 춤을 추며 연회장으로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呼韓牙)는 태어나서 생전 처음보는 미인들에 화려하고 다체로운 모습에 전률을 느끼며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중에서 제일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 시켰다,

그리고 원제(元帝)에게 또 다른 제의를 하였는데,,,,,,
"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 더라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에 한명 이여도 괜찮습니다 " 라고 호한아(呼韓牙)가 원제(元帝)에게 제안하자 원제는 원래 종실에서 공주를 선택하려 하였지만 지금 궁녀 중에서 한명을 선발 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呼韓牙)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 하였다,

이에 원제(元帝)는 호한야에게 직접 마음에 드는 후궁을 선택 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 하였으며 호한아가 가르키는 손쪽으로 따라가 보니 과연 그곳에는 평생 태여나서 처음보는 천하절색 미녀가 사쁘사쁜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

과감하게 노출한 쌕시한 우유빛 몸매에 곱고 윤기있는 머리결은 광체를 말하고 살짝 찡그린 두눈섭엔 원망이 서린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 미모에 원제(元帝)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는데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내린 결정을 반복 할수도 없고 연회가 끝난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에 초상화를 다시 대조하여 보았으나,,,,,

그런데 왕소군(王昭君)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전혀 딴 사람으로 그려진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있어 일부러 그림을 추(醜)하게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순간 노발대발하여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를 현장에서 참수형으로 처형 하였다고 한다,

그후 흉노(匈奴) 족장과의 약속을 도리킬수 없게 되였고 원제(元帝)는 왕소군(王昭君0을 놓치기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밖에도 나오지 않은채 왕소군과 함께 보내며 하늘이 노랗고 코피가 터지도록 격렬한 정을 나누웠다고 합니다,

3 일후 왕소군(王昭君)은 흉노족(匈奴族)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美央宮) 에서 원제(元帝)에게 작별(作別)을 하고 원제(元帝)는 그녀에게 " 소군(昭君) 이란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이 흉노족 단장한 모습을 본 선우(腺于) 호한야는 크게 만족하며 원제에게 무한한 감사의 예(禮)를 표하고 이별(離別)을 고(告) 하였다,

왕소군은 마지막 장안(長安)을 돌아보며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으며 왕소군 일행이 장안 거리를 지나갈때 구경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웠으며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가는 흉노족장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떠났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고국 산천을 떠나는 슬푼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馬) 위에서 앉은 채비로 이별곡(離別曲)을 연주 하였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한 무리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 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아있는 왕소군(王昭君)을 보느라 날개짖도 잃고 그만 땅에 떨어졌다고 하여 왕소군이 미모를 " 낙안 " 떨어질 낙(落) 기러기 안(雁) 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왕소군(王昭君)이 떠날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 였지만 북쪽 변방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쳐 흉노(兇奴)의 땅에 가보니 꽃과 신록이 우거진 한(漢)나라 장안성과 는 천양지천 인지라 그런때에 끌려간 왕소군(王昭君)이 남쪽 한(漢) 나라를 바라보며 " 봄은 왔건만 오랑케의 땅에는 한포기 풀도 없으니 봄은 봄같지 않구나 " 라는 유명한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이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후일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虯)에 의해 전(傳)해지고 있습니다,,

이때 읊은 그 유명한 시(詩)가,,,,,,
호지무화초(胡地無華草) ㅡ 오랑케의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ㅡ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왕소군(王昭君)은 북방 흉노(匈奴)에서 어진 마음으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등 가르치며 한(漢) 나라와 우호적인(友護的因) 관계 유지에 힘써 그후 80 여년 동안 흉노(匈奴)와 한(漢) 나라 사이에 전쟁이 없었다고 하며 왕소군은 72 세 되던해 병(病)을 얻어 돌(石) 무덤에 안장 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무덤을 일컫어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北部支會長 明泉公波 孫 秉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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