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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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선생 - 3.1운동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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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선생 사적(義菴先生事蹟)  

 

공(公)의 성(姓)은 손씨(孫氏), 휘(諱)는 병희(秉熙)이며 호(號)는 의암(義菴)이다. 밀양인(密陽人)으로 밀성군 휘 빈(密城君 諱 贇)의 25세손이고 진사공(進士公) 휘 숙재(淑才)의 원손(遠孫)이며 휘 두흥(斗興)의 아들이다. 1861년 신유(辛酉) 4월 8일에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忠淸北道淸原郡北二面大周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22세 때인 1882년에 보국안민(保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의 대도(大道)인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여 제2세 교조(敎祖) 최해월(崔海月) 선생의 직접 지도 하에 수심연성(修心煉性)하면서 동학(東學)에 새 원리(原理)에 맞는 자연(自然) 또한 진정(眞正)한 새 세계(世界)를 건설하기 위하여 새 세력(勢力) 확장에 전력(全力)을 경주(傾注)하였다.

그리고 34세인 1894년 갑오(甲午)에 선생은 호남 전봉준(湖南 全琫準)과 호응(呼應)하여 최해월(崔海月)을 받들고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휘날리면서 백만의 동학군(東學軍)을 지휘하며 양호간(兩湖間)에서 분전연첩(奮戰連捷)하였으나 세불리하고 운(運) 또한 불순(不順)하여 외국군대(外國軍隊)의 개입(介入)으로 인하여 혁명(革命)의 목적(目的)을 완수(完遂)치 못하고 실패(失敗)하였다.

 

37세 때인 1897년 정유(丁酉) 12월 24일 선생은 최해월(崔海月) 선생으로부터 도통(道統)을 계승(繼承)하고 익년 무술(戊戌) 6월 2일에 해월선생(海月先生)이 경성(京城) 감옥에서 교형(絞刑)을 받은 후 동학(東學)의 재수습에 힘썼다.

41세 때인 1901년 신축(辛丑) 3월에 선생은 세계대세(世界大勢)를 살피기 위하여 미국(美國)으로 가려하였으나 선편(船便)이 여의(如意)치 못하여 일본(日本)에 유(留)하면서 국내청년(國內靑年)의 준재(俊才)를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留學)케 하는 등 인재양성(人材養成)에 주력(注力)하였다.

 

선생의 나이 44세 때인 1904년 갑진(甲辰) 4월에 이르러 노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남을 계기(契機)로 강력한 정당(政黨)을 조직(組織)하여 국정(國政)을 개혁(改革)하고 몽매(蒙昧)한 국민정신(國民精神)을 계몽(啓蒙)할 목적(目的)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였다. 이 때에 동학(東學)은 지하 조직(組織)으로 있었던 만큼 개회(開會) 벽두 경향각지(京鄕各地)에 지부조직(支部組織)을 보게되고 16만회원이 일조(一朝)에단발흑의(斷髮黑衣)로 신생활(新生活)을 갖추어 세상(世上)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진보회(進步會)의 간부(幹部)였던 이용구(李容九)가 중도에 변절(變節)하여 선생의 지도에 불복(不服)하고 송병준(宋秉畯)과 결탁하여 일진회(一進會)와 합병(合倂)하는 동시에 매국행위(賣國行爲)를 강행하므로 선생은 이용구(李容九)에게 엄책(嚴責)을 하달하는 동시(同時)에 그 선후(善後)책으로 교회(敎會)와 정당(政黨)을 분리케 하고 동학(東學)의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세계(世界)에 선포(宣布)하였다.

선생은 46세 때인1906년 병오(丙午) 1월에 귀국하여 단연 이용구(李容九)이하 매국운동에 가담한 62명을 출교(黜敎)하여 교회의 내부를 정화(淨化) 일신하였다. 이후에 선생은 오로지 수심연성(修心煉性)과 포덕제세(布德濟世)의 종교사업(宗敎事業)과 보성계(普成系)의 각급 학교(各級學校)와 동덕여고(同德女高)를 위시하여 경향각지(京鄕各地)에 수백 개소에 달하는 종학원(宗學院)을 설립(設立)하여 민족(民族)의신교육운동을 전개(展開)하는 한편, 보성사(普成社) 경영(출판문화사업) 등으로 교육문화사업(敎育文化事業)의 진작(振作)에 전력(全力)을 경주하였다.

 

또한 48세 때인 1908년 무신(戊申) 1월 18일에 그때까지 직접 교무를 총람(總攬)하던 대도주(大道主)의 직(職)을 춘암 박인호(春菴朴寅浩)에게 전수하고,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을 세워 산운야학(山雲野鶴)을 짝하여 물외(物外)에 소요(逍遙)하면서 심사명상(深思冥想)으로 오직 대도(大道)의 발전을 구상하는 동시에 장래 구국운동(運動)에 대한 준비(準備)로 각 지방(地方)의 유수한 지도자를 선발하여 49일 혹은105일로 연성공부(煉性工夫)를 수행(修行)하였다.

평소부터 조국광복(祖國光復)에 대한 준비를 계속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던 선생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각계각층의 애국세력(愛國勢力)을 총망라한 후 59세 때인 1919년 기미(己未) 3월 1일을 기(期)하여 민족대표(民族代表) 33인의 명의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전국적(全國的)으로 만세운동(萬歲運動)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이로 인하여 동지들과 함께 왜감(倭監)에 피수(被囚)되어 고문(拷問)의 간고(艱苦)를 두루 겪으시다가 익년 1920년 경신(庚申) 10월에 중한 병세로 보석 출감하여 동대문(東大門)밖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하였으나 1922년 임술(壬戌) 5월 19일에 대원(大願)을 달성치 못한 채 한(恨)많은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이 6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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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희 동상

 

저서(著書)는 각세진경(覺世眞經), 준비시대(準備時代), 삼전론(三戰論), 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도결(道訣), 무하설(無何設), 명리전(明理傳), 태종정의설(太宗正義說), 무체법경(無體法經), 후경(後經) 등과 기타 저서가 세상에 광포(廣布)되어있다. 이리하여 선생의 숭고한 업적과 위대하신 공훈(功勳)을 길이 천추(千秋)에 추모선양(追慕宣揚)키 위하여 1959년 기해(己亥) 3월 1일에조동식(趙東植) 유진오(兪鎭午) 이응준(李應俊) 등 13인의 발기(發起)로 선생기념사업회(先生記念事業會) 발기준비회를 개최하고 4월 8일에 발기총회를 천도교당(天道敎堂)에서 개최(開催)하였다.

 

사업을 착수함에 있어 제1차로 묘비건립(墓碑建立)을 추진하여 동건립비 1,420만원을 소요(所要)하여 1959년 10월 3일에 묘비를 건립하고 충청북도문화재보존회주최(忠淸北道文化財保存會主催)로 선생의 출생지인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忠北淸原郡北二面大周里)에 1962년 임인(壬寅) 5월 19일에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고, 1965년 5월 19일에 선생기념사업회(先生記念事業會)에서 서울 탑골공원(塔洞公園)에선생의 동상(銅像)을 세움으로써 선생의 그 빛난 사적(事蹟)과 늠름한 풍도(風度)를 영구(永久)히 찬양 기념케 하여 민족후예들로 하여금 그를 거울삼아 부단한 향상과 국민정신(國民精神)을 고취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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