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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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당(後知堂) 휘 인갑(仁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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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선조 25년). 조선 중기의 무신ㆍ의병장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원첨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의 의병부대에 합류,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실질적인 군지휘 책임자로서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하였다.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이 적을 두고 달아나자 그를 대신하여 한때 합천가장(陜川假將)을 맡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25) 6월 초순에 벌어진 무계전투(茂溪戰鬪) 때 정인홍군의 선봉장이 되어 적병 100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이때 그는 3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적진을 포위한 다음 50여 명의 정예병을 직접 이끌고 왜군의 병사(兵舍)에 뛰어들어 기습전으로 적을 대파한 것이다. 그해 6월 말에 있었던 초계(草溪)의 마진전투(馬津戰鬪)에서도 특출한 전술을 구사, 낙동강을 항해 중이던 왜선단(倭船團)을 급습함으로써 이를 격파한 뒤, 잔류 적선을 섬멸하기 위하여 말을 채찍질하며 물 가운데로 추격하던 중 하상의 묽은 모래와 진흙 속에그대로 빠져 애마와 함께 최후를 마쳤다.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자(字)는 원백(元伯), 호(號)는 후지당(後知堂) 부산포첨사(釜山浦僉使). 선조(宣祖)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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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절각(雙節閣)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宜寧郡 芝正面 城山里)

 

병조판서 휘 인갑(諱 仁甲)이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초계의 마진(馬津) 전투에서 격전중 애마(愛馬)가 뻘 속에 빠져 전사한 것을 본 아들 약해(若海)가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 적들과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후에 향리의 유생들의 상소로 판결사(判決事)에 추증되고 쌍절각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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